[점으로 읽는 빛] “점자는 대체 어디에 있나요…산책은 목숨 건 도전이죠”

안지섭 기자 2026. 4. 1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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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으로 읽는 빛-읽히지 않는 도시] 1-1. 점자가 사라진 날 - 어려운 공원 산책

시각장애인과 돌아본 공원…흰 지팡이 갈 길 잃어
월미공원 걷다보면 1m 연못…안전 펜스도 미설치
보행길엔 전봇대 부딪힐 뻔…화장실엔 성별 미표기
무장애나눔길 시작점 못 찾아…점자 유도블록 전무
▲ 지난달 27일 오후 인천 중구 월미공원 입구에서 보행환경지킴이들이 보행에 장애가 되는 큰 기둥을 살펴보고 있다. /안지섭 기자 ajs@incheonilbo.com

훈맹정음 반포 100주년을 맞이했지만, 시각장애인들의 읽을 권리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단순히 글을 읽는 것을 넘어 세상을 향유할 기회는 당연한 권리가 아닌 목숨을 건 도전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취재진이 시각장애인들과 8000여 보를 함께 걸으며 돌아본 공원에는 여전히 점자 없는 시설이 수두룩했다.

▲연못에 빠지거나 장애물에 부딪히거나…점자 없는 공원에 도사린 위험

"잠깐만요. 이게 뭐죠?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위험 장애물이 있네요. 이거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난달 27일 오후 인천 중구 월미공원 입구. 활동보조사들과 횡단보도를 건너온 시각장애인들의 발이 입구를 향하는 오르막길부터 멈춰 섰다. 조명이 붙은 거대한 돌기둥 앞에 흰 지팡이가 갈 길을 잃었다.

"굳이 이런 기둥을 설치할 필요가 있나요. 점자 유도 블록까지 없으니 우리는 그냥 부딪히는 수밖에 없죠." 시각장애인 A씨가 흰 지팡이로 기둥을 툭툭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천 주요시설 등을 돌아보며 시각장애인들의 보행 안정성을 살피는 '보행환경지킴이' 들의 올해 세 번째 모니터링이 있던 날. 올해는 각 구에 위치한 공원을 대상으로 집중 점검에 나섰다. 1~2월에는 부평구 신트리공원과 미추홀구 화동근린공원을 다녀왔다고 했다.

▲ 활동보조사들과 월미공원을 점검하고 있는 시각장애인들의 모습. /곽안나 기자 lucete237@incheonilbo.com

"여기가 입구예요."

이들의 나침반이 되어 줄, 그러나 찾을 수 없는 점자 유도 블록을 대신해 활동보조사의 목소리를 따라 공원에 들어섰다. 흙으로 된 보도를 걷던 지킴이들의 발은 돌부리에 자주 걸렸고, 때때로 몸도 휘청였다.

▲ 지난달 27일 오후 인천 중구 월미공원을 찾은 시각장애인 A씨가 연못에 지팡이를 넣어 수심을 확인하고 있다. /곽안나 기자 lucete237@incheonilbo.com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큰 규모의 연못이 눈에 띄었다. 서울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부용지를 재현한 곳으로 앞에는 '수심(1.0m)이 깊어 연못에 빠지면 위험하오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경고문이 세워져 있었다. 반면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표지판과 점자 유도 블록은커녕 이들을 보호할 안전 펜스 하나 설치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비장애인에겐 친절했지만, 시각장애인에겐 위험을 알릴 최소한 안내조차 없었다.

"물이 꽤 깊은 것 같습니다."

A씨가 활동보조사의 도움을 받으며 연못으로 다가갔다. 물 깊이를 가늠해보기 위해 넣은 지팡이가 끝도 없이 내려갔다. 지팡이를 따라 A씨의 몸도 연못을 향해 기울자 활동보조사가 "위험하다"며 A씨를 붙든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 성별을 구분할 수 있는 점자 표기가 없는 월미공원 내 화장실. /곽안나 기자 lucete237@incheonilbo.com·

공원에 설치된 화장실도 점검 대상이었다. 왼쪽은 여자화장실, 오른쪽이 남자화장실이라는 건 취재진과 활동보조사들만 알 수 있었다. 성별을 안내하는 점자 표기는 기본이지만, 없는 점자는 읽히지 않았다.

▲ 지난달 27일 오후 인천 중구 월미공원에 있는 화장실 앞에서 시각장애인 A씨가 남자화장실 점자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안지섭 기자 ajs@incheonilbo.com

시각장애인 B씨는 "(성별 표기가 없어서) 화장실에 잘못 들어갈 때가 있다. 안에 있던 분들이 안내해주는 경우도 가끔 있긴하다"면서도 "이런 경우 서로 당황스럽고 민망하다"고 전했다.

▲ 보도블록 위 전봇대가 설치돼 자전거전용도로로 걷고 있다. /곽안나 기자 lucete237@incheonilbo.com·

공원 남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로와 인접한 보행길은 포장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울퉁불퉁했다. 자전거전용도로를 만들기 위해 보행 공간을 좁히면서 길 중간에 설치된 전봇대에 부딪힐 뻔한 상황도 벌어졌다.

▲ 지난달 27일 오후 인천 중구 월미공원의 무장애나눔길을 오르는 보행환경지킴이. 이 안내문에는 점자가 따로 표기돼 있지 않다. /안지섭 기자 ajs@incheonilbo.com

장애인을 위한 무(無)장애나눔길도 살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정상 부근으로 올라가도록 설계된 무장애나눔길의 시작점 역시 시각장애인은 찾을 수 없었다. 무장애나눔길을 설명하는 커다란 나무 안내판에 점자의 자리는 없었다. 무장애나눔길에서조차 시각장애인은 철저히 배제된 듯 했다.

길을 따라 이어지던 로프가 끊겼다. 갈림길이 나왔지만, 점자 유도블록은 없었다. 그대로 직진하면 운동기구가 설치된 자갈밭이었다.

"이렇게 큰 공원에 제대로 된 점자 유도 블록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요. 우리한텐 아무 쓸모가 없어요. 나무랑 꽃만 심으면 뭐 해요. 우리 같은 사람이 찾을 수 있게 해야지." 갈림길을 지나온 시각장애인 C씨가 차게 말했다.

▲월미공원의 안전성은요…"0.1점? 아니 0점!"

"자 이제 월미공원은 어땠는지 서로 얘기해볼까요?"

두 시간가량 지속된 모니터링이 끝난 뒤 의자에 앉아 숨을 돌리던 보행환경지킴이들의 얼굴은 하나 같이 어두웠다. 이들을 이끌던 A씨가 공원에 대한 후기를 묻자 "말할 게 뭐 있어요"라는 반응들이 튀어나왔다.

이날 이들이 월미공원에 매긴 점수는 '0점'. 미추홀구 화동근린공원과 부평 신트리공원이 5점 만점에 각각 4점과 3점을 받은 것과 비교해보면, 완전한 낙제점이었다.

▲ 지난달 27일 오후 인천 중구 월미공원 서문 쪽 화장실 앞에 설치된 돌 앞에서 시각장애인들이 보행 환경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곽안나 기자 lucete237@incheonilbo.com

그나마 성별 구분 점자가 있는 서문 화장실을 봐서라도 1점이나 0.1점을 주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화장실 앞에 떡 하니 세워져 있는 뜬금없는 돌의 등장에 이들의 최종 평가는 0점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 공원은 깨끗해도 너무 깨끗해요. 노란색(점자블록)을 싫어하나 봐요. 비장애인들에게는 넓고 좋겠지만, 저희에겐 동행인 없이 혼자 오면 위험한 요소가 너무 많죠. 시각장애인들끼리요? 안 오죠. 아니, 올 수가 없겠어요."

그나마 걸을 만한 화동·신트리공원

'0점' 월미공원 대비 접근성·편의성 높은 점수

볼라드 점형블록 설치…장애인 화장실은 미비

보행환경지킴이들은 0점을 받은 월미공원과 화동·신트리공원의 차이로 '접근성'과 '편의성'을 꼽았다. 접근성은 시각장애인들이 공원까지 얼마나 쉽게 갈 수 있는지를, 편의성은 공원 내 보행환경 수준을 뜻한다. 취재진은 보행환경지킴이들이 언급한 두 공원을 직접 찾아 해당 요소를 중심으로 특징을 분석했다.

▲ 지난 2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화동근린공원 입구. 볼라드 앞에 점형블럭이 놓여 있다. /안지섭 기자 ajs@incheonilbo.com

▲'완만한 경사' 화동근린공원…점자 없는 장애인 화장실은 아쉬워

인천 미추홀구 도화동 화동근린공원은 신축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 있다. 지난 2일 찾은 공원 입구에는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한 볼라드 앞에 점형블록이 설치돼 있었다.

총 36개 점으로 이뤄진 점형블록은 '멈춤'이나 '주의(경고)' 등을 표시하는 돌출 바닥재다. 울퉁불퉁한 월미공원 바닥과 달리 비교적 잘 정비된 보도블록과 완만한 경사로 보행에 큰 불편은 없어 보였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시행규칙상 '보행안전시설물의 구조 시설기준'에 따르면 볼라드(자동차 진입억제용 말뚝)의 0.3m 전면에는 시각장애인의 충돌 우려가 있는 구조물을 미리 알 수 있도록 점형블록을 설치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벽돌로 이뤄진 화장실 앞에는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이 각각 점자로 기록돼 있었다. 세면대 수전 역시 점자로 '온냉'이 표기돼 있어 물 온도를 맞출 수 있는 환경이었다. 다만, 장애인 화장실은 비장애인 화장실과 분리돼 있었으나 '장애인 화장실'임을 알리는 점자는 없었다.

▲ 인천 부평 신트리공원 갈림길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유도 블록이 설치되지 않았다. /곽안나 기자 lucete237@incheonilbo.com

▲부평 신트리공원, 경사와 갈림길에 '혼동 우려'

보행환경지킴이로부터 3점을 받은 부평 신트리공원은 "입구와 연결되는 자전거도로에 유도블록이 없다"는 이유로 비교적 낮은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지난달 30일 찾은 신트리공원 입구 근처에는 자전거와 차량이 수시로 오가기도 했다. 공원 내부에 경사와 갈림길이 있어 자칫 부상을 입거나 길을 혼동할 우려도 있었다.

▲ 지난달 30일 인천 부평구 신트리공원에 있는 화장실. 이곳으로 향하는 점자유도블록이 상당 부분 마모돼 있다. /안지섭 기자 ajs@incheonilbo.com

신트리공원의 화장실은 총 2곳이었다. 한 곳은 성별 구분 점자가 없었으며 남자 장애인 화장실의 경우 미닫이문 고정이 약해 유지관리가 안 돼 있는 모습이었다. 반면 테니스장 주변 화장실은 점자 안내도 등이 잘 갖춰져 있는 상태였다.

인천시 시각장애인 복지관 관계자는 "장애인 공공시설 이용에 대한 접근성과 편의 제공은 장애인의 권익 보장을 넘어 지역사회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루는 데 최소한의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곽안나·안지섭 기자 ajs@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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