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의 대풍헌] 4월의 황무지에서 올리는 재생의 기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T.S. 엘리엇의 장시 '황무지(The Waste Land)'는 이처럼 역설적인 선언으로 문을 연다. 만물이 생동하는 축복의 계절에 시인은 왜 '잔인함'을 노래했을까.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따르면, 4월은 본래 재생과 부활을 기원하며 성지 순례를 떠나는 희망의 달이다. 그러나 겨울이 주는 평화로운 죽음과 망각의 잠 속에 머물고 싶은 이들에게, 억지로 이불을 박차고 나와 저 약동하는 대자연의 순례에 동참하라 재촉하는 봄의 생명력은 가혹한 고통에 가깝다. 변화와 책임을 거부한 채 정체된 삶을 탐닉하는 정신적 불모지, 그것이 바로 엘리엇이 진단한 현대인의 '황무지'였다.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난 2026년 오늘, 우리가 마주한 4월의 풍경은 엘리엇의 시대보다 결코 덜 잔인하지 않다. 오히려 비극의 밀도는 더 촘촘해졌다. 소강상태와 재점화를 반복하는 피로감, 황량함의 범위는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확장되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장에선 포성이 멈출 줄 모른다. 평화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는 여전히 차가운 진흙 속에 매몰되어 있고, 그 위로 죽음의 먼지만이 켜켜이 쌓여간다.
비극은 그곳에만 머물지 않는다. 중동의 상황은 또 어떠한가. 오랜 종교적, 정치적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매일 스러져 가고 있다. 신의 이름을 빌린 증오가 대지를 적시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자리에는 복수의 다짐만이 메아리친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들이 이제는 생명이 깃들 수 없는 물리적, 정신적 폐허로 변해가는 광경 앞에 우리는 깊은 무력감에 빠진다.
안으로 눈을 돌려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방선거를 앞둔 국내 정치권의 민낯은 공공의 선이 실종된 또 다른 의미의 황무지다. 오로지 당파적 이익과 개인의 영달을 위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어 등을 돌리는 이합집산의 현장, 그곳에 국민의 삶에 대한 진지한 철학이나 미래를 향한 고뇌는 보이지 않는다. 신념 대신 정교한 계산기 소리가 난무하고, 진실한 정책 대신 자극적인 선동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이 찬란한 꽃의 계절에 우리는 왜 이토록 지독한 정신적 허기를 느껴야 하는가. 엘리엇이 갈파했듯, 황무지는 단순한 폐허가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는 믿음의 부재'를 뜻한다. 정치적 셈법 속에서 인간의 존엄은 단지 '표'라는 숫자로 치환되고, 타국의 전쟁 비극은 누군가의 경제적 이익이나 정치적 홍보 도구로 소모된다. 재생이 거부된 죽음과 생산 없는 쾌락, 가치가 소멸한 권력 투쟁만이 남은 자리에서 4월의 햇살은 오히려 그 황량함을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비출 뿐이다.
4월이 더 이상 잔인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윤리적 상상력'을 회복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비명과 중동의 눈물이 나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고, 사익의 늪에 빠진 정치를 공익의 들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정략적 야합이 아닌 보편적 가치의 연대를, 파괴적인 증오의 포성이 아닌 생명의 숭고한 화음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내면의 성찰을 통해 얻은 단단한 신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제 메마른 가슴을 봄비로 적시고, 깊은 곳에서 잠자는 도덕적 뿌리를 거세게 흔들어 깨워야 한다. 고독한 침잠 속에서 부활과 재생의 길을 찾고, 그 적막한 몰입의 희열 속에서 나 자신을 새롭게 빚어내야 한다. 외부의 빛이 아닌 내면의 심지에서 타오르는 등불을 켜고 이 어지러운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4월은 우리에게 '잔인한 달'이 아닌 '위대한 창조의 달'로 거듭날 것이다.
진정한 부활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가장 처절한 성찰 끝에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기어이 이 황무지 위에 라일락을 피워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잔인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최후의 사명이자 유일한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