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을 열망한 특수의 사상가, 하버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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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14일,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하버마스는 독일연방공화국이 홀로코스트라는 특수한 사건을 통해서만 보편성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에 집착했다.
홀로코스트의 특수성에 기초하는 기억 문화는 오늘날 독일인의 머리와 가슴에서 보편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심정이 발흥하게끔 하는 데 여전히 적합한가? 말년의 하버마스는 보편성을 크게 손보거나 확장하는 대신 그것이 사실 지극히 특수하고 연약한 토대 위에 서 있었음을 슬프게 인정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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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14일,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6. 이성의 한계를 성찰하면서도 계몽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던 ‘비판 이론’의 거장이었지만, 그의 죽음을 기리는 세간의 반응은 어딘가 미지근했다. 이는 하버마스의 생애 마지막 몇 년 사이 그가 평생 옹호해온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이 급격히 무너진 현실과 무관치 않다. 보편성의 신화에 균열을 낸 주요 사건에 대한 그의 반응 역시 미덥지 않았다. 하버마스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와의 협상을 주장하며 독일 젊은 세대의 반발을 샀다. 2023년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이 “원칙적으로 정당하다”고 발언해 큰 논란을 낳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하버마스가 자신이 추구해온 보편성을 저버렸다고, 독일이라는 특수한 정체성에 갇혀버렸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리프 펠슈의 ‘하버마스와 우리’(정창호 옮김, 세창출판사 펴냄, 2025)에 따르면, 하버마스는 애초에 세계적 보편성과 독일적 특수성이 공존하는 사상가였다. 지성사가 이우창의 말마따나 이 책은 그간 한국에선 거의 조명되지 않았던 ‘서독의 지식인’으로서 하버마스의 지적·정치적 궤적에 주목한다. 책을 번역한 정창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버마스는 “보편을 열망한 지역의 사상가”였다.
그렇다면 ‘서독의 지식인’으로서 하버마스가 가졌던 특수한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역설적이지만 전후 서독이 일말의 민족적·역사적 특수성도 긍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역사 속 그 어떤 범죄와도 견줄 수 없는 ‘원죄’인 홀로코스트 때문이었다. 1980년대 서독 역사학계에서 홀로코스트를 스탈린의 집단학살이나 서구 식민지배와 비교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하버마스는 홀로코스트가 역사상 ‘유례없는’ 범죄였음을 거듭 강조했다. 홀로코스트라는 원죄로 인해 서독은 오로지 보편적이고 시민적인 정체성에 의해서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게 하버마스의 주장이었다. 그의 ‘헌법 애국주의’는 이처럼 서독이라는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었다.
실제로 전후 서독은 하버마스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국가였다. 제대로 된 수도조차 갖지 못한, “역사상 가장 초라한 국가 중 하나”였던 ‘본 공화국’은 외려 하버마스에게 역사적 성취로 여겨졌다. 헌법을 제외하면 공통의 정체성으로 삼을 만한 지반이 없는 수수한 공화국이야말로 모든 나라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었다. 그런 만큼 그가 갑작스러운 독일 통일에 반대한 건 어느 정도 당연했다. 하버마스는 전후 미국식 ‘재교육’도 68혁명의 경험도 거치지 않은 동독에서 ‘헌법 애국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을지 회의했다. 통일이 불러올 민족주의 열기 역시 우려의 대상이었다.
걱정이 너무 컸던 탓일까. 이후 하버마스는 독일연방공화국이 홀로코스트라는 특수한 사건을 통해서만 보편성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에 집착했다. 2005년 세워진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추모비에 대한 그의 옹호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상징이나 기념물에 대한 20여 년 전의 빈정거림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지은이는 묻는다. 홀로코스트의 특수성에 기초하는 기억 문화는 오늘날 독일인의 머리와 가슴에서 보편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심정이 발흥하게끔 하는 데 여전히 적합한가? 말년의 하버마스는 보편성을 크게 손보거나 확장하는 대신 그것이 사실 지극히 특수하고 연약한 토대 위에 서 있었음을 슬프게 인정한 듯하다. 서구와 적잖이 달랐으나 서구적 보편성에 기대 번영해온 한국의 ‘우리’에겐 하버마스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는 문제가 남았다.
유찬근 대학원생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는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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