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조 퇴직연금 판도 재편…'누가 굴리느냐'가 승부 가른다
판매보다 자산배분·리밸런싱 중요…비은행 계열사 존재감 커져
![[출처=연합]](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3/552778-MxRVZOo/20260413150606184mgoo.jpg)
퇴직연금 시장의 무게중심이 판매에서 운용으로 옮겨가고 있다. 적립금은 500조원에 육박했지만 수익률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자 정부가 전문가가 자산을 굴리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어서다. 금융지주들도 제도 윤곽이 나오기 전부터 지주 차원의 대응 체계를 서두르고 있다. 기금형이 자리 잡으면 은행 창구 경쟁만으로는 승부를 보기 어렵고, 증권과 자산운용 역량을 얼마나 결집하느냐가 판도를 가를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13일 금융권과 금융당국에 따르면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지난해 말 기준 496조8021억원이다. 시장은 커졌지만 운용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최근 5년 기준 DB 원리금보장형 평균 수익률은 2~3% 수준에 그쳤고, DC 원리금비보장형도 3~7% 수준에 머물렀다. 디폴트옵션 적립금 53조3000억원 가운데 85.4%가 원리금보장형에 쏠려 있고 평균 수익률은 2.63%였다. 퇴직연금이 사실상 예금성 자산에 머무르면서 장기 수익률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는 이유다.
정부가 기금형을 꺼내 든 것도 이 한계를 손보겠다는 취지다. 기금형 제도는 운영의 책임성과 자산운용 전문성을 제고해 기존 계약형 제도의낮은 수익률을 보완하고 노후소득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됐다.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는 과거에도 몇 차례 도입이 검토됐지만 퇴직연금 사업자인 금융업권의 반대로 도입이 무산돼 왔다. 그러다 지난 2월 노·사·정 공동선언으로 퇴직연금 의무화와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이 예고된 상황이다.
◆전문운용조직이 자산배분 리밸런싱…수익률 제고
계약형은 회사가 은행·증권사·보험사와 계약을 맺고 회사나 근로자가 직접 상품을 선택하는 구조라면 기금형의 경우 여러 사업장의 자산을 모아 규모를 키우고, 전문 운용조직이 장기 관점에서 자산배분과 리밸런싱을 맡는 방식에 가깝다. 정부는 오는 7월까지 구체적인 운영 방안을 마련하고 연내 법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자산운용사나 증권사가 수탁을 맡아 퇴직연금을 굴리는 '금융기관 개방형'모델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 밖에 연합형 기금,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 등도 대안 중 하나다.
금융지주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대목은 수익률 부분이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장기 수익률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위험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가입자에게 운용 과정과 손실 가능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가 핵심이다. 상품 판매보다 자산배분과 운용 철학, 리스크 프레임, 사후관리 체계가 중요하다.
그래서 지주사들은 은행 등 일부 축만으로는 대응이 어렵다고 보고 있다. 은행은 기업 고객 접점과 가입자 관리, 상담 채널에서 강점을 갖는다. 그러나 실제 성과를 좌우하는 전략 자산배분과 상품 소싱, 리밸런싱, 자문 체계는 증권과 자산운용 기능에 더 가깝다. 전통적으로 은행은 압도적 점유율을 유지하며 '연금 강자'로 자리해왔지만, 지난해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 도입 이후 이미 판세가 흔들렸다.
보험과 신탁은 연금 지급, 보장, 사후관리에서 역할을 맡게 된다. 기금형이 도입되면 은행이 고객 기반을 맡고, 증권과 운용이 수익률을 만들고, 보험과 신탁이 지급 구조를 받치는 식의 그룹 단위 분업 체계가 본격화할 가능성이 크다.
◆농협금융, 선제적 움직임…'NH올원더풀'로 라이프케어
주요 금융지주들이 최근 세미나와 워킹그룹, 태스크포스를 잇달아 가동하는 것도 이런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농협금융지주가 선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지주 차원의 태스크포스를 가동해 자회사들이 제도 변화의 방향을 함께 이해하고 도입 이후 역할 분담까지 미리 점검한다. 특히 농협금융은 NH투자증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 강점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금형 퇴직연금은 자산운용과 자본시장 기능이 경쟁력을 좌우할 가능성이 큰데 NH투자증권은 5대 금융지주 계열 증권사 가운데 시장 지배력이 가장 높은 가장 큰 증권사다. 은행 판매망보다 운용과 자문 역량이 더 중요해지는 시장에선 이런 자본시장 계열사의 존재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또 농협금융그룹은 시니어 특화브랜드 'NH올원더풀'을 통해 퇴직연금 수령기 고객들에게 세무상담부터 노후 맞춤형 자산설계까지 아우르는 라이프케어 플랫폼을 제공하고 있다.
신한금융은 기금형 전환 전략을 올해 주요 과제로 올려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를 중심으로 장기 운용 체계를 준비한다.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은 최근 주주서한을 통해 기금형 퇴직연금 확대에 대비한 다양한 전략과 실행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신한자산운용은 OCIC(외부위탁운용관리)에 적극적인 하우스다. 다른 금융지주들도 정부의 구체적인 방향이 나오면 본격적으로 전략수립에 들어갈 예정이다.
물론 제도 도입까지는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수탁자 책임과 거버넌스, 이해상충 방지, 공시 체계, 소비자 보호 장치가 함께 정비돼야 한다. 퇴직금을 특정 기구가 집중 운용하는 구조에 대한 거부감도 적지 않다. 국회 청원 등을 통해 재산권 침해와 정치적 개입 가능성을 우려하는 반대 목소리가 나온 것도 이런 이유다. 금융권 안팎에서도 계약형과 기금형을 병행하면서 점진적으로 넓혀가는 방식이 현실적이라는 시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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