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미래에 이동통신 강국 되려면"...퀄컴의 설득, 통했다
퀄컴의 전쟁<4>
우리나라는 이동통신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가다. 우리나라의 이동통신이 없었다면 코드분할 다중접속(CDMA) 방식은 채택되기 힘들었을 것이고, 퀄컴 역시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디지털 방식의 2세대 이동통신이 도입될 무렵 퀄컴은 약자였다. 미국에서 2세대 이동통신의 표준이 시분할 다중접속(TDMA) 방식으로 결정된 상황에서 퀄컴이 개발한 코드분할 CDMA 방식은 '소수 의견'일 뿐이었다.
TDMA의 견고한 성을 깨기 위해 퀄컴이 들고 나온 전략은 해외 공략이었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들부터 CDMA를 채택하도록 만들어 세력을 넓히면 미국에서 CDMA를 표준으로 밀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때 퀄컴의 우선 순위에 든 국가가 한국이다.

이동통신의 변방 국가였던 한국
지금은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이동통신 강국이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는 기술이 뒤처진 변방 국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동통신 서비스는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통신 기술과 장비는 모두 외국산 일색이었다. 우리나라는 그저 남의 기술로 서비스만 제공할 뿐이었다.
정부 주도 아래 1988년 도입한 아날로그 방식의 1세대 이동통신은 공기업이었던 KT 산하의 자회사 한국이동통신이 독점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인 1992년 정부는 이동통신 서비스를 늘리기 위해 제2 이동통신사업자를 선정했다. 그때 선경그룹(현 SK)이 뽑혔으나 노 전 대통령과 고(故) 최종현 회장이 사돈 관계여서 정경 유착과 특혜 시비 논란이 일었다. 부담을 느낀 선경은 이동통신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한국이동통신도 매각 대상에 올랐다. 다시 도전장을 던진 선경은 1994년 한국이동통신 지분 공개매각 입찰에 참여해 4,271억 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들여 지분 23%를 획득하며 최대주주가 됐다. 1997년 선경그룹 산하로 편입된 한국이동통신이 지금의 SK텔레콤이다.
1세대 이동통신은 서비스 업체의 독과점 못지않게 통신장비의 심각한 외산 의존도가 문제였다. 휴대폰부터 큰 돈이 들어가는 통신망, 기지국 장비까지 모토로라, 노키아, 노던텔레콤, AT&T 등 외산 일색이었다. 따라서 국내업체들은 서비스 이용요금만 받는 셈이었다.
정부는 이런 식이면 이동통신의 미래가 없다고 보고 2세대 이동통신에서 자체 기술력을 확보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퀄컴은 이 부분을 주목했다.

CDMA 상용화 앞당긴 한국
퀄컴은 해외 시장 공략을 위해 전 세계 기업과 정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CDMA 기술 시연회와 세미나 등을 자주 열었다. 이런 행사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참여하면서 국내에서도 CDMA 기술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전까지 우리 정부도 미국, 유럽처럼 TDMA 방식을 2세대 이동통신으로 고려했다. 그러나 TDMA 방식은 1세대 이동통신 시절부터 장비를 공급해 온 해외업체들이 기술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뒤늦게 우리나라가 끼어들어봐야 얻을 게 없었다. 오히려 2세대 이동통신 또한 외국업체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퀄컴은 이 부분을 파고 들어 ETRI에 CDMA 상용화를 위한 기술을 공동개발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도 이동통신 기술의 지적재산권(IP)을 확보해 휴대폰부터 각종 통신장비 개발에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다. 1991년 ETRI는 퀄컴과 CDMA 상용화를 위한 기술 공동개발 계약을 맺었다. 기초 기술은 퀄컴이 개발했지만 상용화에 필요한 기술을 한국과 공동 개발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 정부로서는 좋은 기회를 잡았지만 상용화를 확신하지 못했다. TDMA가 주요 국가에서 2세대 이동통신의 대세로 기우는 마당에 CDMA를 선택했다가 잘못하면 전 세계 기술표준에서 밀려나 외톨이가 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그때부터 국내에서는 2세대 이동통신 표준을 놓고 정치권까지 나서 CDMA와 TDMA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정부 부처 간에도 의견이 갈렸다. 당시 상공부는 TDMA를, 정보통신부는 CDMA를 지지했다
퀄컴은 CDMA 기술을 알리기 위해 홍보에 적극 나섰다. 특히 앨런 살마시 퀄컴 부사장이 수시로 방한해 정부와 언론을 상대로 CDMA 상용화를 설득했다. 살마시 부사장은 당시 국내 언론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이 CDMA 기술을 최초로 도입하면 미래의 이동통신강국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결국 정부는 1994년 CDMA를 2세대 이동통신의 기술 표준으로 결정했다. 이어서 이듬해 이동통신의 확산을 위해 도입한 개인휴대통신(PCS)도 CDMA를 채택했다. PCS는 정부가 이동통신업체를 늘려 경쟁체제를 만들어서 비싼 통신요금을 낮추려고 시작한 디지털 방식의 이동통신이다. 명칭과 주파수만 다를 뿐 기존 이동통신과 다를 바 없다.
이때 식별번호 016, 018, 019를 사용하는 PCS 업체 KTF, 한솔PCS, LG텔레콤이 등장했다. 이들은 훗날 KT에 통합되거나 LG유플러스로 바뀌었다. 또 PCS 업체는 아니지만 경쟁체제 확대를 위해 017번호를 사용하는 이동통신업체 신세기통신도 나타났다. 신세기통신은 2002년 SK텔레콤에 합병되면서 SK텔레콤이 이동통신 1위업체가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나라는 1996년 1월 한국이동통신에서 처음으로 CDMA 방식의 이동통신 서비스를 개통했다. 이후 4월에 서울과 수도권에서 상용 서비스를 시작했고 9개월 만에 전국망을 구축했다. 이를 두고 당시 국내에서는 세계 최초의 CDMA 상용화로 홍보했지만 기록을 보면 세계 최초의 CDMA 상용화 업체는 홍콩의 허치슨텔레콤이다. 허치슨텔레콤은 우리보다 앞선 1995년 9월 CDMA 서비스를 시작했다. 다만 도시 단위의 홍콩과 달리 국가 전체의 상용 서비스라면 우리가 앞선 셈이다.
CDMA 상용화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1997년 PCS 시작 전까지 PCS의 기술방식을 놓고 CDMA와 TDMA의 기술 논쟁이 꺼지지 않았다. 그 바람에 당시 정보기술(IT)을 담당했던 기자들은 연일 논문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이동통신 기술 기사를 써야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CDMA와 TDMA 기술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것은 그때 혹독하게 단련된 덕분이다.

"중국보다 한국에게 기술사용료를 더 받았다"...퀄컴과 ETRI가 벌인 소송
우리나라가 CDMA 방식의 이동통신 서비스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면서 도입을 주저하던 다른 나라들과 미국의 이동통신업체들도 CDMA 기술을 다시 보게 됐다. 특히 퀄컴이 최대 해외시장으로 꼽았던 중국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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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진 IT전문기자 wolfpa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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