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터진 폭탄, 붓으로 받아내다

장종회 2026. 4. 1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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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미 개인전 ‘찬란한 봄날, 역설의 풍경’
4월15일~5월11일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
고영미 작, 별밤_한지위에 채색, 85x60cm,2024
[한국금융신문 장종회 기자] 봄이 왔다. 벚꽃이 진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미사일이 날아든다. 중동에서 또다시 전쟁이 터진 가운데 화가 고영미(46)가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전쟁 풍경화 20여 점을 선보인다.
고 작가가 4월 15일부터 5월 11일까지 여는 이번 전시회는 제목부터 ‘찬란한 봄날, 역설의 풍경’이다. 지난 2006년부터 20년에 걸쳐 고 작가가 그려온 '전쟁 풍경화' 20여 점이 한자리에 내걸린다.
이번 전시의 직접적인 계기는 분명하다. 지난 3월 불붙은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이다. 고 작가에게 전쟁은 어느날 갑자기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다. 20여 년 전, 군 복무 중 한쪽 눈을 잃은 동생과 관련된 아픈 상처가 바탕에 깔려 있다.
당시 실명한 동생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지만 폐쇄적인 군 조직 앞에서 책임도, 보상도 요구할 수 없었다. 거대한 국가 권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고 작가는 그 무력감을 그림으로 돌렸다. 분노를 화면 위에 쌓으며 시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동생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은 그 너머로 계속 향했다. 북핵 위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학살. 세계는 멈추지 않고 전장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고영미 작, 그날_한지꼴라주위에 채색, 72.5x103cm, 2012

전장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독특하다. 뉴스 화면 속 전쟁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작가는 카메라가 잡지 못하는 것, 혹은 잡으려 하지 않는 것을 더 또렷하게 본다. 폭격 이후 먼지처럼 쏟아지는 건물 잔해. 정유시설이 폭발한 뒤 시커멓게 치솟는 연기. 그 너머에서 계속되는 고통. 작가가 그려내는 세상이다.

이란-미국·이스라엘 전쟁은 미사일 궤적이나 열감지 이미지 같은 비물질적 데이터로 소비된다. 전쟁이 스펙터클한 영화의 한 장면이나 온라인 게임의 일부처럼 비쳐지는 시대다. 그러나 고영미의 화면에서 전쟁 풍경은 신호의 집합이 아니다. 살과 피가 있는 현실이다.

현대전의 양상은 AI를 빼고 말할 수 없다. 인공지능이 표적을 식별하고 작전을 설계하는 시대. 승인 한 번으로 다량의 목표물에 미사일이 날아간다. 기술은 정밀해지고 있지만 죽어 나가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다. 가자지구의 역설은 더 크고 깊다. 한때 나치 독일의 박해로 희생자가 됐던 이들의 후손이 이제는 같은 땅에서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가해자로 둔갑한 모양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현재에도 진행형이다. 고 작가는 이 모든 모순을 찬란한 봄 풍경 위에 얹어 놓는다.

작가의 작업 방법론도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그는 장지에 채색하는 전통 동양화 기법을 고수한다. 홍익대 동양화과를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고, 지난해에는 색채 전공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 20년의 학문적 바탕과 실전 내공이 화면에 녹아 있다. 한지 콜라주 위에 쌓이는 색채의 층위는 기억이 몸에 쌓이는 방식과 닮았다. 찬란하게 아름다운 봄 풍경 속에 전쟁의 상처가 겹친다. 전시회 타이틀이 말해주는 '역설'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아름다움과 폭력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는 것이다.

예술과 전쟁의 관계는 예술계에서는 오래된 주제다. 고야는 나폴레옹 군의 학살을 총구 앞에 선 익명의 인물들을 통해 기록했고, 피카소는 게르니카 폭격을 흑백의 처절한 화면으로 고발한 바 있다. 안젤름 키퍼는 검게 탄 들판과 납, 깨진 유리로 전쟁 후의 폐허를 재현했고, 비디오아트 창시자인 백남준은 과달카날 전장의 이미지를 교차 편집해 죽은 이들의 안식을 빌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서용선 작가가 노근리와 한국전쟁을 20년 넘게 화폭에 담고 있다. 고 작가는 이 계보 위에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예술가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고 작가 나름의 응답이다.
고영미 작, 맞닥뜨린 장면, 한지 위에 채색, 90×100cm 2026

고 작가가 지난해에 연 개인전 ‘빨강의 기억’은 이번 전시회의 전사였다. 당시 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충격을 '빨강'이라는 색으로 풀어냈다. 전사자의 피, 여성의 몸, 생과 사가 뒤섞인 색깔, 빨강은 죽음이자 동시에 탄생이었다. 전쟁이 야기하는 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생명의 이미지가 한 색 안에 공존하는 것을 그려냈다. 이번 전시는 그 연장선 위에서 중동이라는 새로운 전선을 마주하며 한층 넓어진 지평을 보여준다. 작가의 세계관이 한 전쟁에서 다음 전쟁으로 가는 사이에 더 심화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한반도에서 바라보는 중동과 유럽의 전쟁. 지리적 거리는 멀어도 작가의 몸은 반응한다. 뉴스 영상 속 난민이 끌고 가는 캐리어. 거리에 나뒹구는 시신들. 죽은 여성의 몸에 새겨진 표식들. 타인의 재난이 자신의 공포로 전이되는 감각. 고 작가는 그것을 기억하고, 축적해서 화면 위에 꺼내 놓는다. 고 작가의 작업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불안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좋은 영화는 첫 장면에서 결말이 암시되듯, 고 작가의 그림에는 그런 구조가 엿보인다. 찬란하게 피어난 봄 풍경이 종말의 서막처럼 읽힌다. 아름다운 것이 무너지기 직전의 순간을 그는 그리고 있다. 비 내리고 바람 부는 봄밤 거리에서 지는 벚꽃처럼, 아름답지만 어딘가 깊은 슬픔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고 작가는 그 슬픔 안에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위한 기도를 담는다.

찬란한 봄날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꽃이 피는 동안에도 어딘가에는 폭탄이 떨어지고 있다. 인사동 골목을 지나다 보면 마주칠 이 전시가 한층 묵직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고영미 개인전 포스터

장종회 한국금융신문 기자 jhchang@fn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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