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위협①] 전방위로 퍼지는 경고음… '독자 생존' 내몰린 한국
기술 초격차 무색하게 만드는 ‘국가 자본’ 습격…시스템 부재 속 ‘사투’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기술과 공정 혁신에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최근의 산업 전쟁은 기업 개별의 경쟁력을 넘어 거대 자본과 행정력을 앞세운 ‘국가 대 국가’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에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등 자원 없는 국가의 설움을 겪고 있다. 특히 1등 기술을 보유하고도 시스템의 뒷받침 없이는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에 직면해 있다. 이에 미디어펜은 3회에 걸친 기획 연재를 통해, 사투를 벌이는 기업들의 현주소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우리 산업 시스템의 현실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미디어펜=조우현 기자]2026년 4월 대한민국 주력 산업의 지표는 엇갈린 양상을 보인다. 반도체가 인공지능(AI) 특수에 힘입어 기록적인 실적을 올리고 있는 것과 달리 가전과 배터리, 핵심 부품 산업은 중국의 공세 속에서 기술적 우위를 지켜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다.

◆ 반도체 실적 랠리 이면의 ‘그림자’… 범용 시장 ‘올인’하는 중국
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4 등 고부가 가치 시장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며 역대급 실적 랠리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 기업들이 ‘기술 초격차’로 시장을 주도하는 흐름은 견고하지만, 화려한 실적 이면에는 중국발 공급망 재편이라는 숙제가 남아있다.
중국 기업들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레거시’(Legacy, 범용·구형) 반도체 제조능력 제고에 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 반도체는 부가가치가 높은 대신 사용처가 제한적인 반면, 레거시 반도체는 부가가치는 낮지만 자동차 등 사용처가 광범위한 데다 기술 연마와 인력 확보가 용이해 중국 기업들이 ‘해볼 만하다’고 여기는 분야다.
실제 지난달 상하이에서 열린 ‘세미콘 차이나 2026’에서 중국 반도체 업계는 2030년까지 자급률을 80%로 끌어올리겠다는 다소 공격적인 목표를 제시하며 속도전을 예고했다.
이는 실질적인 점유율 압박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레거시 점유율은 이미 30%대를 돌파했으며, 중국 최대 파운드리 업체 SMIC는 삼성전자에 이어 글로벌 3위 자리를 굳히는 모양새다.
◆ 가전, 고가 전략으로 수익 지켰지만 ‘기초 체력’은…
가전 분야는 매출액 기준으로는 여전히 국내 기업들이 프리미엄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나, 글로벌 시장의 ‘양적 성장’ 지표에서는 이미 중국에 주도권을 내어준 상태라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지금 당장은 프리미엄 제품군을 판매해 수익을 내고 있지만, 산업의 뿌리인 보급형 시장을 중국에 조금씩 내어주면서 브랜드 영향력이 프리미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고리’가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중적인 제품이 중국산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결국 프리미엄 시장에서의 영향력도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다.
실제 글로벌 TV 시장에서 중국 TCL은 점유율 1%p 차이로 삼성전자를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유로모니터인터내셔널 보고서에 따르면 냉장고 등 대형 가전은 이미 하이얼(Haier)이 15년 연속 세계 1위를 수성했다.
국내 시장에서도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고가 라인업인 로봇청소기 시장에서 중국 로보락(Roborock)이 점유율 50% 이상을 확보하며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제 기술력에서도 한국 가전이 안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남게 됐다.
◆ 부품·배터리, 1위 기업도 ‘사투’… 국가 자본 앞세운 중국발 부품 굴기
핵심 부품 산업인 삼성전기와 LG이노텍은 중국발 공급망 재편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삼성전기의 경우, MLCC(적층세라믹콘덴서) 시장에서 견고한 위상을 지키고 있으나 중저가 범용 제품군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추격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중국 정부의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등에 업은 업체들이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며 물량 공세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세는 카메라 모듈 시장에서도 가시화되고 있다. 독보적 지위를 유지해온 LG이노텍의 경우, 중국 코웰(Cowell) 등 후발 주자들이 파격적인 단가를 앞세워 공급망 내 비중을 확대하며 거센 압박을 가하는 모양새다.
업계 관계자는 “기술적 우위만으로는 중국의 가성비와 국가적 지원을 이겨내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며 “1위 기업조차 안심할 수 없는 중국발 부품 굴기가 우리 산업의 방어선을 위협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배터리 업계 역시 전기차 수요 둔화와 중국산 저가 LFP(리튬인산철) 배터리의 공습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삼성SDI가 견고한 수익성을 유지하고 LG에너지솔루션이 실적 수성에 나서는 등 K-배터리의 저력은 이어지고 있으나, 시장의 파이를 키워가는 중국 업체들과의 점유율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양상이다.
실제 중국 CATL이 지난해 15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순이익을 내며 자본력을 축적하는 동안, 우리 기업들은 해외 공장 초기 가동 비용과 원가 압박 등 녹록치 않은 환경 속에서 수익성을 지켜내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 자구책 마련에 분주하지만, 정작 이를 뒷받침해야 할 정책 시스템은 여전히 규제와 정치 논리에 가로막혀 있는 상황이다. 기업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국가 차원의 전략적 조력은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국가 자원을 총동원하는 중국과 달리, 우리 기업들은 전력망 확보나 인허가 문제조차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독박 생존’ 환경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