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 없이 푸르게 채워진 동백동산의 퍼즐 [제주, 어디까지 아세요 선흘리 동백동산]

제주 겨울의 주인공은 동백이다. 일 년 내내 시퍼렇기만 하다가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새빨간 꽃을 피우는 동백은 11월 말부터 이듬해 4월 초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덕분에 이 시기에 제주를 찾으면 고고한 자태를 맘껏 뽐내는 붉은 동백꽃을 만날 수 있다. 짙은 초록의 숲에서, 때로는 새하얀 눈 속에서도 선홍빛으로 빛나는 동백꽃의 존재감은 실로 강렬하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의 동백동산은 꽃을 감상하며 걷기에 그만이다.

선흘곶자왈의 상록활엽수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이 숲의 거대함과 짙은 신록에 놀라게 된다. 일부러 심어서 가꿔도 이리 빽빽한 숲을 만들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동백동산은 그 밀도가 치밀하다. 선흘곶자왈의 일부인 이곳은 수령 20년을 훌쩍 넘긴 동백나무가 10만 그루 이상 군락을 이뤄서 따로 동백동산이라 부른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후박나무, 종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녹나무 같은 난대성 상록활엽수도 숱하게 섞인 천연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동백동산에서는 동백꽃을 보기가 쉽지 않다. 보호림으로 지정되고 벌목도 금지되면서, 다른 나무에 비해 성장이 더딘 동백이 햇볕을 쬐기 위해 위로만 자라다 보니 꽃을 피울 여력이 없어졌고, 또 꽃이 피어도 너무 높아서 아래서는 잘 안 보인다.

숲 아래로는 각종 이끼류와 양치식물, 콩짜개덩굴 같은 게 뒤덮어 온통 신록의 세상이다. 한라산국립공원 구역이 아닌 평지에 남은 난대성 상록활엽수 숲으로는 제주에서 가장 넓다고 하니 더욱 소중하고 특별한 곳이다. 동백동산 천연 숲의 깊은 속살을 휘휘 저으며 사농바치(사냥꾼)나 화전민이 다녔을 법한 오솔길이 지난다.
숲, 동굴, 습지 등 다양한 자연조건을 두루 갖춘 총 길이 5km의 탐방로는 쉬엄쉬엄 2시간쯤 걸린다. 자연생태계 관찰과 환경교육, 휴양에도 더할 나위 없는 동백동산은 한겨울에 꽃을 만나고 푸른 잎사귀 무성한 숲도 거닐 수 있어서 참 좋다.

동백꽃과 화가 강요배
동백은 유채와 함께 제주를 대표하는 꽃이다. 곤충이 거의 활동하지 않는 겨울에 꽃을 피우기에 벌이 아닌 새가 수정을 담당하는 조매화다. 곤충보다 신진대사량이 많은 새를 불러들여야 하기에 동백꽃에는 꿀이 많다. 그러나 향기는 나지 않는다. 붉디붉은 동백꽃은 새빨간 꽃송이째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진다. 그 모습이 처연해서일까.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가 짝사랑한 꽃이 동백이고,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 그중 제주 출신 화가 강요배의 작업은 주목할 만하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이어진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된 사건이 '제주 4·3 항쟁'이다. 보통 '제주 4·3' 또는 '4·3'이라고 한다. 붉은 동백꽃은 제주 4·3의 상징으로 사용되는데, 그 기원이 되는 작품 <동백꽃 지다(1991)>를 그린 이가 강요배다.
강 화백은 '알 수 없는 공포의 장막, 그 너머에 있는 제주 4·3'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고, 지금도 4·3 역사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제주에 불어 닥친 피바람, 특히 4·3과 그 역사를 살아낸 인간에 대한 숙고를 떨어진 동백꽃으로 표현했다. 4·3의 희생자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 없이 쓰러져갔음을 나타낸 그의 작품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백꽃을 볼 때마다 4·3이 떠오르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사계절 내내 낙엽 지는 상록수림
4월 중순이 지나면 벚꽃엔딩과 함께 동백꽃도 모두 사라진다. 꽃이 떠나간 자리엔 더욱 짙어진 초록의 동백나무 이파리가 무성하다. 그때면 적은 개체로 섞여 사는 낙엽활엽수도 연둣빛 새싹을 틔워서 선흘리 동백동산의 모든 퍼즐은 빈틈없이 푸르고 푸르게 채워진다.
들머리의 '동백동산습지센터'를 출발해 숲속으로 한 걸음만 떼면 순식간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조금 전까지의 하늘은 오간 데 없고, 온통 짙은 상록수림과 새소리만 공간을 가득 채운다. 숲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겨우 밝히는 곶자왈 풍광이 신비롭다. 상록수림은 가을뿐 아니라 사철 내내 낙엽이 진다. 그래서 4월의 동백동산은 낙엽 깔린 길을 밟으며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 봄을 만끽하는 공간이다.

곧 거문오름 용암 동굴계에 속하는 도틀굴을 만난다. 길이가 331m인 도틀굴은 4·3 때 선흘리 마을 주민들이 숨어들었다가 토벌대에게 발각돼 학살된 가슴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숯을 굽던 흔적인 숯막과 구실잣밤나무·개가시나무 군락, 용암의 앞부분이 굳으면서 가운데가 부풀어 올라 만들어진 상돌언덕 등 곶자왈이 품은 제주의 신비로움이 고스란히 펼쳐지는 길은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진다.

유일하게 하늘이 열리는 먼물깍
노출된 돌을 이끼가 가득 덮은 '이끼정원'을 지나자 관중을 비롯해 홍지네고사리, 산족제비고사리, 일색고사리, 가는쇠고사리, 꼬리고사리 같은 제주의 양치식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땅 위를 기듯 뻗은 나무뿌리를 넘고, 덩굴식물이 밀림을 이룬 어둑어둑한 천연림 속을 한참 돌아다닐 때 갑자기 눈앞에 훤해진다. 동백동산 탐방로의 하이라이트인 '먼물깍'이다. 동백동산에서 하늘이 열리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물이라는 '멀물'과 끄트머리를 뜻하는 제주어 '깍'이 합쳐져 생긴 말인 먼물깍. 곶자왈 안에서 흘러내린 물이 지대가 낮은 이곳에 고여 이룬 연못으로, 옛날 선흘 주민들이 주변에 담장을 둘러 식수로 썼고, 이 물로 말과 소도 길렀다. 사람들은 먼물깍 주변 숲에서 동백기름을 얻고, 나무를 베서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이었다.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던 숲은 2011년 람사르습지로 지정되었고, 이제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본래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먼물깍을 지나자 길은 넓어지고, 곧 선흘리 포제단과 마을 가장자리를 에둘러 동백동산습지센터로 되돌아온다.
교통
함덕환승정류장에서 선흘1리 웃가름정류장을 오가는 704-1, 704-3, 704-4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웃가름정류장에서 동백동산까지는 900m쯤 거리다. 704-4번은 동백동산습지센터까지 간다.
주변 볼거리

카페 '비케이브' 정원의 동굴
동백동산 정문에서 동쪽으로 500m쯤에 있는 카페 '비케이브' 정원에 자연 용암동굴이 있다. 크지 않은 동굴은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에 속한 것으로, 지붕이 얕아서 몇 곳이 무너지며 동굴 출입구와 천장 일부가 드러났다. 안에 들어가서 천장의 구멍을 통해 쏟아지는 빛을 이용해 찍는 사진이 멋져서 인기가 좋다. 몇 해 전에는 동굴만 입장이 가능했으나, 지금은 카페를 통해야 한다.

맛집
선흘리의 '채식카페 제주작은부엌'은 아름답고도 맛있으며, 건강한 채식 한 상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다. 안거리·밖거리·모커리·쇠막으로 구성된 제주 전통 가정집을 개조한 작은 식당으로, 이름처럼 우유와 달걀은 물론, 모든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비건 채식 메뉴에 특별함을 더한 식당이다. 테이블이 두세 개뿐이며, 예약제로 운영한다. 메뉴는 비건채식풀코스(4만 원)와 현미야채떡볶이(1만7,000원), 채개장국밥(1만2,000원)이 전부인데, 계절마다 살짝 메뉴가 바뀌기도 한다. 차려지는 음식이 하나같이 예술 작품 같고, 맛도 좋다. 오전 9시에 문을 열고 오후 3시에 영업을 마감한다.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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