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뻥' 뚫린 장쾌한 조망 [경상도의 숨은 명산 상주 노음산]

경상도란 이름의 '상'을 맡은 근본 있는 고장인 상주. 그 상주를 대표하는 산 중 하나가 갑장산, 천봉산과 더불어 노음산露陰山이다. 세 산을 일컬어 상산삼악尙山三岳이라 한다. 조선 중기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노음산을 두고 '주 서쪽 10리에 있는 서의 노악'이라 평하며, '북의 석악(천봉산), 남의 연악(갑장산)과 함께 상산삼악이다'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예로부터 상주 대표 명산으로 이름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노음산은 해발 725m로 규모는 크지 않으나 '이슬처럼 맑고 드러난 바위의 산'이란 이름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듯 화려하게 돌출된 암릉과 수려한 조망을 자랑한다. 천년고찰도 '남장사', '북장사' 두 개나 있다.

노음산만의 독특한 리듬, '오르다 쉬고 오르다 쉬고~♬'
상주는 예부터 쌀·누에고치·곶감의 흰 분으로 이름난 삼백三白의 고장이다. 남장사 이정표를 보고 들어선 길에는 곶감 특구 남장마을이 펼쳐졌다. 자연 바람과 햇볕으로 말리는 전통 방식의 곶감 덕장이 마을을 거대한 공방처럼 보이게 했다. 남장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3월 볕이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가늘고 투명하게 쏟아졌다.
산행 들머리는 경상북도 문화유산 제33호로 지정된 남장사 석장승이었다. 높이 186cm, 마을과 사찰 어귀에 서서 귀신과 액운의 출입을 막아온 마을의 수호신이다. 투박하면서도 해학적인 표정의 장승 앞에 서서 안전 산행을 기원했다. 장승이 지켜온 세월만큼이나 듬직한 기운이 등을 밀어주는 것 같았다.

완만한 숲길을 따라 숨 고르며 오르니 땅 위에서는 잔설이 채 녹지 않은 자리마다 새파란 봄 풀이 얼음장 같은 땅을 비집고 머리를 내밀었다. 아직 겨울의 기억이 남아 있었지만, 발아래 낙엽 사이사이마다 봄의 전령들이 분주히 몸을 풀고 있었다. 산 전체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리는 듯, 숲은 생동하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첫 안부에 도달하자 벤치가 쉬어가라고 한다. 석장승에서 0.9km 지점, 정상까지 2.2km 남은 곳에 '건강과 행복한 삶을 위해 숲이 필요한 이유' 안내판이 서 있다. 건강 유지·긍정적 분위기·스트레스 해소 등의 효과가 적혀 있는데 함께 오른 이는 "노화 방지가 제일 마음에 든다"며 웃음꽃을 피웠다. 흐르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걸 새삼 느끼는 시기인 터다.
정상까지 1.2km, 옥녀봉 삼거리에서 능암리 방향으로 국수봉을 다녀오기로 했다. 능선으로 이어진 길은 예상보다 거칠어 만만치 않았다. 노음산 능선 중에서 비교적 험해 오르는 산꾼들의 발길이 뜸했는지 등산로가 선명하지 않고 잡목이 길을 덮어 방향 감각을 흐트러뜨렸다. 한편으론 조용하고 한적하며, 야생적인 산을 탐험하는 재미를 더해 주기도 했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 발이 푹푹 빠지고, 언 땅이 녹아 질척거리며 미끄러운 된비알을 한 차례 세게 치고 오르니 작은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기왓장 크기의 소박한 돌 하나가 국수봉을 알렸다. 쏟은 노력에 비해 소박한 정상석을 보며 밀려오는 허탈함에 친구들과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래도 뭔가가 더 있겠지 하는 호기심에 능선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 조망이 터지는 곳에 가서 주변에 있다는 성터를 찾아봤는데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는다.
능암리 방향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갔다 올라오자니 무리일 것 같아 발길을 돌려 옥녀봉 삼거리로 되돌아온다. 다시 숨을 몰아쉬며 주능선을 오른다. 옥녀봉은 표지석도 없고 숲에 가려 조망도 없어 무심코 지나쳤다.
노음산의 매력은 힘든 오르막 끝에 반드시 편안한 능선길이 펼쳐지고, 또 편안한 길을 걷다 보면 다시 오르막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오르고 쉬고, 또 오르고 쉬는 그 반복의 리듬 속에서 쉼표를 넣어 숨을 고르고, 웃을 수 있었다. 노음산만이 줄 수 있는 색다른 맛이다.

압권의 조망, 정상부 암릉 전망 바위
사람들이 노음산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계단 데크 암릉 조망 터다. 이곳에 닿는 순간,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산군들의 파노라마.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이 자리에 서면 사방의 명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찬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라면 이곳에서 반나절을 보내도 아깝지 않을 압권의 전망이었다.
남쪽으로는 남장리마을과 남장지南長池 저수지가 선명하게 내려다보이고, 그 뒤로 오늘 하산할 남장사의 기와가 숲 사이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 그 너머로는 상주 최고봉 갑장산(806m)이 듬직하게 버티고 서 있다. 갑장산은 상산삼악 중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예로부터 상주의 남쪽을 수호하는 산으로 일컬어졌다. 능선의 굴곡이 완만하면서도 당당한 갑장산의 자태는 남쪽의 주인공이었다.
북쪽으로는 남장사와 쌍벽을 이루는 북장사北長寺가 산허리에 고즈넉이 안긴 모습이 선명하게 조망된다. 북장사 너머로는 상산삼악의 하나인 천봉산의 능선이 백두대간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간다. 오늘처럼 조망이 열리는 날에는 속리산 방면의 산줄기까지 시선이 닿는다.

동쪽으로는 상주 시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낙동강 물길이 적셔 온 비옥한 들판 위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상주 시가지가 마치 모형 도시처럼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인다. 그 너머로는 드넓은 경작지가 이어지고, 먼 동쪽 지평선 위로는 희미하게 산줄기가 겹쳐 보인다. 낙동강이 적신 상주의 너른 들판이 이 산의 동쪽 발치에서 시작된다.
서쪽 조망이 이 전망대의 하이라이트다. 100대 명산에 속하는 백화산白華山(933m)의 날카로운 능선이 서쪽 가까이 우뚝하고, 그 너머로 국립공원 속리산(1,058m)의 장엄한 실루엣이 겹겹이 펼쳐진다. 더 멀리로는 희양산(999m)의 우람한 봉우리가 아스라이 솟아 있으며, 이 산들을 이어주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서쪽 지평선을 수놓는다. 봄 안개가 걷힌 맑은 날, 서쪽 하늘 아래 한 폭의 수채화처럼 겹쳐 서는 능선들은 이 전망대를 노음산에서 가장 오래 머물고 싶은 자리로 만들어 주었다.
한편 찬란한 조망의 한쪽 면에서 마주한 한 숲의 표정은 조금 달라 가슴 한구석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몇 해 전 할퀴고 간 산불의 흉터가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건만 뼈대만 남은 고사목들은 그날의 뜨거웠던 비명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다.

중궁암, 하늘에 달린 선경
짧은 밧줄 암릉 구간을 지나면 지척에 노음산 정상이다. 국수봉 왕복을 포함해 2시간 50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정상석은 여느 산과 달리 특이하게 누워 있다. 바위 위에 노음산의 유래가 새겨져 있었다. 정상은 조망이 자라난 나무로 막혀 있다.
하산길은 부엽토가 많은 흙길이다. 층층이 쌓인 길고 가는 솔잎이 서로 엉키면서 공기층을 형성해 천연 스프링 역할을 해준다. 덕분에 한결 기분 좋은 발걸음을 내딛었다.
바람, 햇빛의 보살핌으로 곧게 뻗은 소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팔각정 쉼터에서 상주 시가지를 조망하며 잠시 숨을 고른다. 가파른 나무 데크 구간을 안전하게 내려서면 중궁암中穹庵이다.

해발 540m 지점에 자리한 중궁암은 '하늘 가운데에 달린 것 같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안개가 산야를 뒤덮는 날에도 중궁암 위로는 항상 안개가 없어 중궁이라는 편액의 뜻을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곳을 노음산 속의 선경仙境이며 극락이라 불렸다.
중궁암은 남장사의 산내 부속 암자로, 언제 창건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남장사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 수행 공간으로 이어져 왔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2020년 화재로 건물 3동이 전소되었으며, 그 화마의 흔적이 주변 돌탑과 그을린 나무 사이에 아직 남아 있다. 그러다 2025년에 새롭게 단장된 법당과 요사채가 들어서며 다시 한 번 '하늘 위의 암자'로 거듭나고 있다.

경내를 둘러보는 중에 올해 초 부임한 암자 스님이 80세 노처사를 배웅하고 돌아서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 준다. 스님은 중궁암의 의미와 새로이 단장한 암자 이야기를 유쾌한 입담으로 풀어냈다. 또 300년 이상 된 보호수를 배경으로 상주 시가지가 조망되는 자리에서 우리 일행의 기념사진도 예쁘게 찍어 주신다. 중궁암은 수행의 고요함과 인간적인 온기가 함께 머무는 자리다.
노음산 자락의 천년 고찰 남장사
중궁암에서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솔잎 덮인 부드러운 하산 길을 따라 내려서니, 관음선원觀音禪院의 툇마루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는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관음선원에는 보물로 지정된 목각탱木刻幀이 봉안되어 있으나 법당문이 닫혀 있어 보진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남장사南長寺로 향했다. 832년 신라 진감국사 혜소慧昭가 창건한 절이다. 창건 당시에는 장백사長柏寺라 불렸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었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다가 여러 차례 복원되었다. 현재 남장사에는 보물 제901호로 지정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鐵造毘盧遮那佛坐像을 비롯한 귀중한 문화재가 있다. 그래서 이곳은 단순한 불교 사찰을 넘어 상주 지역의 역사·문화적 정수를 담은 공간이다.

저물어가는 햇살이 목조건물을 붉게 물들인다. 경내를 둘러보고 다리를 건너니 400년 이상 수령의 보호수 느티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었다. 수백 년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그 거목 앞에서 인간의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새삼 실감했다. '노악산남장사'라는 현판 글씨가 적힌 일주문을 통과하며 오늘의 산행이 마무리되었다. 일주문 옆 약수터에서 차가운 약수 한 사발을 들이켜니, 오늘 하루의 노고가 그 자리에서 말끔히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노음산 산행을 마무리하고 경천대擎天臺에 들렀다. 태백산 황지黃池에서 발원해 1,300여 리를 흘러내리는 낙동강 물길이 유장하게 흐르며 빛을 반사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이 낙동강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고도 한다. '하늘을 떠받드는 바위'라는 이름처럼 빨간빛 사암 절벽이 낙동강 푸른 물 위에 아찔하게 솟아 있다.


산행길잡이
노음산은 경북 상주를 대표하는 산으로 암릉 조망과 부드러운 육산 숲길이 조화를 이루는 산이다. 남장사 주차장~석장승~암봉~옥녀봉삼거리~노음산~팔각정~중궁암~관음선원~남장사~주차장이 대표적인 코스며 역순으로 진행해도 무방하다.
남장사 주차장에서 석장승 들머리, 남장사에서 중궁암 들머리 모두 편도 왕복할 경우 둘 다 약 7km, 4시간 30분이면 사찰 구경까지 충분하다. 산행 코스를 잡을 때 해발 540m 지점에 자리한 중궁암은 노음산 자락에서 가장 조망이 뛰어난 수행처이니 꼭 들러 보기를 추천한다.
교통
서울 동서울TG ~ 중부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북상주IC ~ 북천교에서 청주보은 방향 ~ 남장사
대전 대전TG ~ 경부고속도로 ~ 서산영덕 고속도로 (청주 ~ 상주) ~ 화서IC ~ 남장사
부산 대동TG ~ 중앙고속도로(부산/대구) ~ 경부고속도로 ~ 김천분기점 중부내륙고속도로 ~ 상주IC ~ 보은 방면 ~ 남장사
맛집(지역번호 054)
세느제과점(535-4803)은 찹쌀떡 맛집으로 유명한 오래된 제과점이다. 겉은 쫄깃한 찹쌀, 속은 부드러운 팥앙금으로 관광객보다 현지 단골이 많다. 조기 품절되기 일쑤다. 남천식당(535-6296)은 새벽 5시부터 영업해 아침 일찍 식사하기 좋은 시래기 해장국 노포다. 가격이 3,000원으로 매우 저렴하다. 분위기가 매우 정겨워 합석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뭉근한 불 곁에서 인내의 시간을 견뎌낸 듯 부드러운 시래기, 구수한 된장 향이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는 국물 맛으로 상주의 너른 들판을 닮아 있었다.
남산가든(535-2281)은 고추장 불고기와 양파무침의 환상 조합으로 현지인들에게 사랑받는 석쇠구이전문점이다.
석쇠에 얇게 펼친 돼지고기를 구워 불향이 강하게 배는 것이 특징이다. 상주축산농협 명실상감한우프라자 (531-9911)는 상주 대표 한우식당이다. 상주시와 축협이 만든 브랜드 '명실상감 한우'를 맛볼 수 있다. 신선하고 믿을 수 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
점심 특선 200그릇 한정인 상감 한우탕 1만5,000원. 선산 김치곱창(533-8025)은 상주지역 숨은 별미로 꼽히는 김치곱창전골 전문점이다. 얼큰한 김치 국물에 곱창의 고소한 기름이 어우러져 진하고 깊은 국물 맛을 내는 전골요리다. 산행 후 땀 흘린 뒤 얼큰한 국물, 단백질 많은 곱창의 조합이 좋아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다.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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