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병원·빈집·전세사기까지…조례 하나가 동네를 바꿨다

2026. 4. 1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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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의회는 무용지물? 생활의 빈틈 메운 조례의 힘
지방의 작은 조례가 국회 차원의 정책 논의 촉발도
서울시 노원구 노해근린공원에 있는 ‘모두 맘껏 놀이터’는 장애·비장애 아동들이 함께 놀 수 있는 공간이다. 박송이 기자

지방선거를 앞두고 기초의회 무용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예산 낭비, 중복 행정, 존재 이유를 모르겠다는 목소리다. 관심이 없으니 누가 나오는지도 모르고, 모르니 ‘묻지마 투표’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동네에서는 조례 하나가 놀이터를 바꾸고, 병원 문 여는 시간을 당기고, 버려진 집을 살리고, 보증금을 잃은 피해자 곁에 가장 먼저 닿았다. 기초의회와 기초단체가 제 역할을 할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 4곳의 이야기를 들었다.

통합놀이터, 장애·비장애 아이가 함께 노는 공간

미끄럼틀에 계단이 없다. 대신 완만하게 이어진 경사로가 꼭대기까지 이어진다. 시소는 앉아서도 누워서도 탈 수 있다. 그네는 마주 보는 그네, 혼자 타는 그네 등 세 종류가 나란히 놓여 있다. 트램펄린은 바닥에 깔려 있어 턱없이 이용할 수 있고, 모래놀이 테이블은 휠체어를 탄 채로 놀 수 있는 높이에 맞춰져 있다.

서울 노원구 노해근린공원에 있는 ‘모두 맘껏 놀이터’ 이야기다.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노는 ‘통합놀이터’로, 2024년 12월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아이들의 놀이를 지원하고 장애 아동의 놀이를 돕는 ‘놀이활동가’ 2명도 상주한다. 이들은 생활임금 정도의 급여를 받으며 월요일부터 수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아이들 곁에 머물며 놀이를 연결한다. 놀이활동가가 되기까지 약 6개월의 교육 과정이 필요하다. 장애·비장애 아동의 놀이 특성, 심폐소생술 등을 포함한 안전관리, ‘모두를 위한 놀이’ 계획 수립 등을 배우고 놀이 교안을 직접 만들며 현장 실습까지 마쳐야 한다. 유수연 놀이활동가는 “체계적으로 배우고, 또 1년 넘게 활동하다 보니 상황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놀이, 또 장애 아동과 비장애 아동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놀이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라며 “놀이활동가 조끼를 입고 있을 때가 제일 좋다. 즐겁고 보람되다”라고 말했다.

‘모두 맘껏 놀이터’ 운영은 노원구의회 조례에 근거하고 있다. ‘노원구 통합놀이터 조성 및 관리에 관한 조례’(노연수 의원 발의)는 통합놀이터와 놀이활동가의 개념을 법적으로 정의하고, 구청장의 책무와 지원 계획까지 규정한다. 해당 조례는 2025년 더불어민주당 우수조례 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모두 맘껏 놀이터’는 설계부터가 조례에서 시작됐다. ‘노원구 유니버설디자인 기본 조례’(노연수 의원 발의)에 따라 장애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원칙이다. 오래전부터 ‘놀이터의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로 연구와 캠페인을 이어온 민간단체 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도 함께했다. 2023년 3월 노원구의회·노원구·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는 ‘모두 맘껏 놀이터 만들기 1000일’ 협약을 맺고, 발달장애인 4명을 포함한 놀이환경 진단 조사단을 꾸려 현장을 살폈다. 실제 이용자의 목소리가 설계에 담긴 것은 그 결과다. 노연수 의원은 “놀이터를 단순히 노는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처음 배우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며 “아이들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생각을 조율하는 법을 배우는 차별 없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용자들의 만족도 또한 높다.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김은애씨는 “무척 만족한다. 아이가 활동적이지 않은 편이었는데, 놀이활동가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이끌어주니 놀이터에서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라며 “저도 잠깐이나마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기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안수지 학생(15)은 “구청에서 진행한 ‘나도 건축가’ 프로그램에 참여해 놀이터에 대한 의견을 냈는데, 장애·비장애 아동이 함께 쓸 수 있는 놀이기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실제로 반영된 걸 보고 뿌듯했다”라고 했다. 아이들의 놀이터 경험은 놀이터 밖으로도 이어졌다. 이영희씨는 통합놀이터를 좋아하는 아이가 이제 다른 공간에 가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지, 계단은 없는지 스스로 살핀다고 전했다. “왜 어떤 곳은 들어가기 어려운지 묻더라고요. 이 아이들이 커서 장애 친화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국회와 정부를 움직인 조례

아이가 갑자기 아플 때, 맞벌이 부부의 아침 출근 시간은 전쟁이다. 대부분 소아과가 오전 9시에 문을 열기 때문이다. 2024년 부산 사하구 여성회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근 전 어린이 병원’ 지정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국공립 어린이집을 중심으로 서명이 이뤄졌고, 순식간에 1500명이 참여했다. 100~200명 서명을 받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며칠 만에 1500명 서명을 받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경애 부산여성회 대표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병원 문 열기 전에 남편이 먼저 가서 대기표를 뽑아놓고,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며 “아침 시간에 병원을 다녀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더라”라고 말했다. 서명지에는 서명만이 아니라 “도와주세요”라는 간청이 이어졌다. 정 대표는 “한마디씩 적힌 내용을 보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며 “개별 가정 문제가 아니라 지역 전체의 문제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기숙사 조성 전 방치된 빈집 모습. 부산시 제공

요구는 ‘사하주민대회’를 통해 구의회로 전달됐다. 여러 안건 가운데 우선순위 투표에서도 상위에 올랐다. 이후 주민대회 조직위원회와 시민단체가 구의원들을 만나 설명했고, 이를 바탕으로 강현식 사하구의원이 ‘새벽별 어린이병원 조례’를 대표발의했다. 조례의 핵심은 병원이 기존보다 2시간 일찍 문을 열 경우 인건비와 운영비 일부를 구에서 지원하는 구조다. 강현식 구의원은 “주민들이 먼저 필요를 제기했고, 이를 정책으로 만든 사례”라고 말했다. 해당 조례는 정치 스타트업 뉴웨이즈가 수여하는 ‘2030 유권자가 뽑은 우수 조례’ 대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해당 조례는 발의에서 통과까지 다수 의원의 공감대 속에 빠르게 진행됐지만 실행 단계에서 한계가 드러났다. 병원 참여가 쉽지 않았다. 추가 인력과 운영 부담에 비해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의료수가가 반영되지 않는 구조에서는 지속 운영이 어렵다는 것이 병원 측 입장이었다. 그러나 논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산해 국회 차원의 입법 논의로까지 이어졌다. 박정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8월 출근 시간대(오전 7~9시)에 아픈 자녀들이 원활하게 진료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지자체 지원을 넘어 건강보험 체계 안에서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문제 제기다. 보건복지부도 이 같은 문제의식을 토대로 하반기 중 공공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새벽 시간대 소아 진료’ 모델을 시범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방의 작은 조례가 제도적 한계에 부딪히면서 오히려 중앙 정책 논의를 촉발한 셈이다.

기초단체가 선제적으로 나선 지방소멸

부산 영도구 청학동에는 창문이 다 깨진 채 수년 동안 버려져 있던 집이 있었다. 50년 넘게 청학동에 살아온 정영애씨는 그 집을 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던 지난 3월 이 집은 깔끔하게 수리가 되고 외국인 유학생 기숙사로 탈바꿈됐다. 부산시가 추진한 ‘빈집 매입 및 생활 SOC 조성 사업’을 통해 영도구와 한국해양대가 협력해 총 11억7000만원을 투입해 만든 기숙사였다. 정씨는 “비어 있던 곳에 사람이 들어오니 이웃이 다들 좋아한다. 지난번에도 빈집을 경로당으로 바꿔서 잘 활용하고 있다. 여전히 빈집이 많은데 더 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부산의 늘어나는 빈집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지적돼왔다. 그러나 지자체가 빈집을 매입하고 이를 공공시설로 바꾸면서 빈집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부산연구원이 1990년부터 2024년까지 빈집 관련 언론 보도 1500여건을 분석한 결과, 부정적 키워드 비중은 2014년 70%에서 지난해 40%대로 낮아졌고, ‘개선’ ‘해결’ 같은 긍정적 키워드는 60%를 넘어섰다.

문제는 돈이다. 빈집 정비의 핵심은 사유지 매입인데, 법적 갈등과 재정 부담이 발목을 잡는다. 부산연구원이 개발한 빈집 발생 위험도 ‘SOS 지수’에서 부산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꼽힌 영도구는 지난해 1월 ‘부산광역시 영도구 빈집정비기금 설치 및 운용 조례’를 제정했다. 연간 7억원씩 5년간 총 35억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한다는 게 골자다. 광역시도 아닌 구 단위 기초단체가 지방소멸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한 사례로 해당 조례는 2024년 법제처 기초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영도구청은 “기금이 일정 규모 이상 조성된 이후에는 이자 수익 등을 활용해 빈집 정비, 활용 및 안전관리 등 관련 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라고 했다. 재정 기반을 별도로 마련하지 않으면 사업이 지속될 수 없다는 점에서, 조례는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장치로 작동했다.

특별법보다 앞선 피해자 지원 조례

2023년 7월 제정된 ‘서울시 강서구 전세피해 및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조례’(고찬양 강서구의원 발의)는 전세사기를 지역 차원의 재난으로 규정하고, 기초의회가 직접 대응에 나선 사례다. 피해가 집중된 지역이었던 강서구의회는 국가 차원의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 안정에 관한 특별법 시행 전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조례를 마련했다. 전세사기 피해자를 대상으로 법률 상담, 소송 비용, 주거 지원 등을 제공하는 것이 골자다. 고찬양 구의원은 “국가 차원의 특별법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법이 시행되기까지의 ‘입법 공백’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며 “당장 오늘 내일을 걱정하는 피해자들의 연쇄 파산을 막고, 신속하게 주거 안정과 심리 치료를 돕기 위해 조례 제정을 서둘렀다”고 설명했다.

조례의 실효성은 숫자에서 드러난다. 2026년 3월 말 기준 강서구 전세사기 피해 접수는 총 2208건이며, 이 가운데 1583명이 피해자로 인정됐다. 피해 보증금 규모는 약 3843억원에 달한다. 소송 수행 경비 지원은 1072건, 약 10억7200만원이 집행됐고, 청년 월세 지원 14건(2880만원), 무료 법률 상담 188건이 진행됐다. 조례는 제정 이후에도 보완됐다. 2023년 말 소송비 지원 확대를 시작으로, 2025년에는 특별법 연장에 맞춰 존속기한을 늘리고 위험 주택 관리 및 정보 제공 근거를 강화했다. 이 조례는 2023년 법제처 우수조례, 2025년 뉴웨이즈 우수조례로 선정됐다. 고 구의원은 “국가의 지원이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지자체가 얼마나 빠르고 유연하게 메울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라며 “강서구가 피해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신뢰를 드린 것이 가장 큰 의미”라고 말했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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