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태석의 빛으로 쓴 편지] 비움의 자리에 피어난 보랏빛 설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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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일출을 마중하기 위해 가파른 산길을 헉헉거리며 오른다.
해 뜨기 전의 경이로운 하늘을 마음에 담겠다는 일념으로 숨 가쁘게 달렸건만 야속한 태양은 찰나의 차이로 이미 고개를 내밀고 말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상에 대한 욕심을 비워내자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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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일출을 마중하기 위해 가파른 산길을 헉헉거리며 오른다. 해 뜨기 전의 경이로운 하늘을 마음에 담겠다는 일념으로 숨 가쁘게 달렸건만 야속한 태양은 찰나의 차이로 이미 고개를 내밀고 말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숲길에 멈춰 서서 거친 숨을 고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정상에 대한 욕심을 비워내자 비로소 마음이 평온해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조급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숲길 옆 작은 식물들이 소중한 생명의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한참을 걷다 발치에서 말로만 듣던 ‘얼레지’를 만났다. 직접 마주한 꽃은 군락을 이룰 만큼 지천이었지만 정상만을 바라보며 앞만 보고 달릴 때는 결코 보이지 않던 선물이었다. 본래 봄은 기다림의 미학이었다. 매화가 언 땅을 뚫고 향을 내뿜으면 개나리와 진달래가 차례로 산을 물들이는 것이 오랜 약속이었으나 요즘 산천의 시계는 어긋나 봄꽃들이 차례를 잊은 채 한꺼번에 피고 진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풍경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얼레지는 고개를 낮춘 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킨다. 자줏빛 꽃잎을 뒤로 젖힌 모습 때문에 ‘바람난 여인’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씨앗이 꽃을 피우기까지 7년이라는 세월을 견뎌낸 정직한 인내가 담겨 있다. 서두르지 않고 스스로를 피워내는 이 꽃의 자태는 진정한 봄이란 온도가 아니라 기다림의 시간임을 조용히 일깨워준다. 욕심을 비운 자리에 내려앉은 얼레지가 건네는 고요한 보랏빛 편지다.

왕태석 선임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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