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톨게이트와 트럼프의 뉴노멀 헬게이트 [홍길용의 화식열전]
“돈을 내느냐 돌아가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덴마크 에릭7세(Erik7)는 셸란(Sjælland) 섬 끝자락 헬싱외르(Helsingør)에 크론보르(Kronborg)라는 성을 짓는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Hamlet)의 배경이 된 엘시노어 성의 모델이다. 이 곳과 스웨덴의 스코네(Skåne Län) 사이에는 외레순(Øresund) 해협이 있다. 북해에서 발트해로 가는 최단 뱃길이지만 가장 좁은 곳의 폭이 4.5km에 불과했다. 1429년 크론보르 성에 설치된 대포가 해협 전체를 사정권에 두면서 이 곳을 지나는 배에 통행료를 부과했다. 외레순통행세(Øresundstolden)다.

북독일과 발트해 연안의 무역·안보연합체인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이 이에 반발해 전쟁을 일으켰다. 장기간의 전쟁 끝에 1436년 한자동맹은 덴마크로부터 통행세 면제를 약속받는다. 덴마크는 이처럼 상대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며 400년 이상 외레순통행세를 유지했다. 덴마크가 이 체제를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구조적 이유가 있었다. 덴마크는 단순한 징수자가 아니었다. 발트해 무역이 번성할수록 통행세 수입도 늘었다. 징수국과 수혜국이 같았다. 해협을 봉쇄하는 것보다 여는 것이 덴마크에 더 이익이었다.
외레순통행세가 폐지된 계기는 미국이다. 1855년 미국은 “자연이 준 물길에 주권을 주장하며 돈을 뜯는 행위는 불법”이라며 통행료 지불 거부를 통보했다. 덴마크는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16개국에 통행료를 폐지하는 대신 ‘일시불 보상금’을 받는 코펜하겐협정을 1857년 타결시킨다.
길을 열기 위해 나라를 세우다…파나마
1898년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필리핀을 손에 넣었다. 태평양 한가운데 군사 거점을 갖게 된 것이다. 문제는 해군이었다. 대서양 함대와 태평양 함대를 따로 유지하기엔 전력이 부족했고, 그렇다고 한 쪽을 비우면 나머지 대양을 포기하는 셈이었다. 남미 최남단 마젤란 해협을 돌아가는 우회로는 너무 멀었다. 미국에게 파나마는 선택이 아니었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하나의 해군력으로 통제하기 위한 필수 인프라였다.
1903년 11월 2일. 파나마에 미국 함대 10척이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동시에 도착했다. 파나마 독립을 막으려는 콜롬비아 군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파나마는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은 파나마 운하의 건설과 운영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확보했다. 파나마에 일시불과 연간 지급금을 건넸지만, 미국이 원한 것은 수익이 아니었다. 대서양과 태평양 함대를 자유롭게 이동시킬 수 있는 통행의 자유—그것이 목적이었다. 1855년 덴마크에게 “자연의 물길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고 선언했던 그 미국이, 반세기 만에 스스로 운하를 장악했다. 패권국은 언제나 자신만의 예외를 만들어왔다.
수에즈 운하 지키지 못한 영국, 패권도 잃다
1956년 이집트가 영국이 운영권을 가지고 있던 수에즈 운하의 국영화를 선언했다. 영국이 반발했고, 지분이 있던 프랑스, 이집트를 견제하던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수에즈 운하 탈환에 나섰다. 제2차 중동전쟁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때다. 미국은 서방의 공격을 받은 아랍이 소련 쪽에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에 제동을 걸었다. 소련도 이집트 등 아랍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를 견제했다. 수에즈는 이집트가 이긴 전쟁이 아니었다. 길목의 주인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뀐 사건이었다. 미국은 1957년 1월 아이젠하워 독트린(Eisenhower Doctrine)을 선언하며 중동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미국의 전략 DNA는 일관됐다. 세계의 핵심 길목은 적국은 물론 동맹도 단독으로 통제하게 두지 않는다. 덴마크로 하여금 외레순을 열게 했고, 파나마를 직접 접수했으며, 수에즈 운하를 영국에 넘겨주지 않았다. 트럼프가 최근 다시 파나마 통제권 강화에 나서고 북극 영향력 확대를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과 덴마크의 악연이다. 19세기엔 외레순에서 맞붙었고, 21세기엔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두고 다시 충돌하고 있다. 길목을 쥐려는 미국의 논리는 170년째 바뀌지 않았다.
세기의 난제 된 호르무즈해협
이번 중동 전쟁 전까지 미국과 이란의 거래 구조는 단순했다. 핵을 포기하면 경제 제재를 풀겠다는 구조다. 그런데 호르무즈 해협이 새롭게 부상하면서 방정식이 바뀌었다. 이란은 협상 테이블에 카드를 하나 더 올렸고, 미국은 숙제를 하나 더 떠안았다.
사실 호르무즈 해협 통행료는 세기의 난제라고 할 만하다. 바닷길 통행을 막는 게 국제법상 불법이라고 하지만 통행료 부과의 주체가 될 이란과 미국은 해당 법을 비준하지 않았다. 이란도 미국도 이번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상당하다. 통행료는 어찌보면 가장 손쉽게 경제적 보상을 얻을 방법이다.
4월 12일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 47년 만의 미-이란 고위급 대면 협상이 21시간 만에 결렬됐다. 미국은 핵 포기를 레드라인으로 삼았고,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 인정을 레드라인으로 내걸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레드라인이 맞부딪힌 셈이다. 설령 협상이 재개되고 전쟁이 끝나더라도 이전의 질서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어찌됐던 호르무즈 해협을 무상으로, 마음 놓고 항해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문제는 통행료 그 이후다. 이란도 산유국이다. 자국 원유 수출도 호르무즈를 통한다. 그러나 이란의 셈법은 덴마크와 다르다. 미국 제재로 이란산 원유는 사실상 중국 한 곳으로만 팔리고 있다. 배럴당 8~10달러 할인된 가격에 팔리면서도 살 곳이 없는 처지다. 호르무즈 통행료는 이 구도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카드다. 통행료는 사우디, 이라크, UAE 원유를 싣고 지나는 선박에 부과하되, 이란 원유는 면제하거나 우대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미 싸게 팔리던 이란산 원유의 가격 경쟁력은 더 올라간다.
통행료는 징수 수단인 동시에 경쟁 산유국을 견제하는 마케팅 도구가 된다. 덴마크가 한자동맹에는 면제를 주고 다른 상대에게는 받았던 그 차등 전략을, 이란은 원유 시장에서 더 정교하게 구사할 수 있다.
통행료의 시대, 저효율 고비용의 뉴노멀 예고
중동 산 원유 수송로로서 호르무즈 해협의 독보적 위치는 단기간에 흔들리기 어렵다. 새로운 수출 경로를 만들려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이란이 통행료 수입을 기반으로 경제를 회복시키고 원유 경쟁력까지 강화하면, 중동의 안보 긴장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호르무즈 해협을 이용하는 이들의 불만과 불안이 커지면 무력 충돌로 이어지기 쉽다. 미국이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 독점만큼은 막으려는 이유다.
2차 대전 이후 미국 패권은 핵 확산 금지, 항행의 자유 보장, 달러 중심 경제 시스템 등 세 개의 기둥 위에 존재해왔다. 핵 확산 금지의 둑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달러 중심 체제도 도전을 받고 있다. 항행 자유까지 시험대에 올랐다. 미국이 이번에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을 얼마나 견제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한국은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70%에 육박한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가 막히거나 통행료가 부과되면 에너지 비용 상승이 물가와 무역수지를 동시에 압박한다. 1857년 코펜하겐협정 당시 16개국은 일시불 보상금을 내고 외레순을 영구히 열었다. 지금 세계가 호르무즈 해협에서 그런 합의를 만들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면 세계 경제, 그리고 우리 경제는 새로운 표준(New Normal)에 대비해야 한다. 협력 대신 경쟁과 대결이 앞서는 세계—길목마다 통행료가 붙고, 공급망마다 지정학이 끼어드는 고비용·저효율의 시대다.
이 질서에서는 실력과 레버리지가 생존의 조건이다. 다행히 한국에는 반도체, 피지컬 AI, 원자력, 방산, 조선, 모빌리티, 소프트파워까지 쓸 수 있는 카드가 적지 않다.
다만 이 카드들은 글로벌 공급망과의 협업 속에서만 가치를 발휘한다. 혼자 판 위에서 잘 써야 효력을 발휘하는 패다. 제도와 시스템, 정치력과 외교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좋은 패도 버린 패가 된다. 아마 그 성패는 주식 시장에서 확인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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