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의 사회의학 클리닉]수입된 신념, 방치된 여성건강
2019년 4월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놓았다. 벌써 7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7년이 흘러갈 줄은 몰랐다. 이제 임신중지 자체는 딱히 불법이 아니지만, 합법적 서비스를 받을 방법은 마땅치 않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필수의료를 외치지만, 정작 세계보건기구(WHO)가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한 임신중지 약물은 여전히 한국에서 구할 수 없고, 임신중지에 대한 진료표준이나 건강보험 수가도 마련돼 있지 않다. 절박한 여성들은 여전히 의학적,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음성적인 임신중지 서비스에 몸을 맡겨야 하는 것도, 시기를 놓쳐 태아 살해나 유기로 처벌을 받는 것도 여성들이다. 코모도왕도마뱀처럼 여성이 단성생식으로 임신에 이르렀다면 모를까,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임신중지를 합법화하고 정식 의료서비스로 제공하면 임신중지가 늘어날 것이라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 미안하지만 임신중지는 금지한다고 줄어드는 게 아니라, ‘위험한’ 임신중지만 늘어날 뿐이다. 세계적으로 임신중지가 합법이고 피임과 임신중지 같은 양질의 보건의료서비스가 잘 갖춰진 곳일수록 의도하지 않은 임신이 적고 임신중지율도 낮게 나타난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7년
국회는 여전히 법 개정에 소극적
개인의 종교적 신념 앞세우기보다
입법기구로서 공적 책임 우선해야
“그까짓 거 낙태하면 되니까, 막살아야지” 하면서 임신중지를 ‘남용’하는 여성은 임신중지 반대론자들의 망상 속에만 존재한다. 어쩌면 스스로의 ‘타락’이 두려운 이들의 나약한 자아가 과장된 반대 외침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임신중지가 불법 혹은 비합법의 영역에 머무를 때, 여성의 건강이 직접적으로 위협받는다는 점이다. 루마니아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임신중지가 합법이었던 1960년대, 관련 모성사망비는 출생아 10만명당 20명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악명 높은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인구를 늘릴 목적으로 임신중지를 전면 금지하면서 사망비는 점차 높아져 1989년 159명이 되었다. 독재자의 몰락과 함께 임신중지가 다시 합법화되자 단 1년 만에 사망비는 83명으로 낮아졌고 지금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임신중지 약물의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 함부로 도입하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전 세계인과 다른, 한국인만의 특별한 약물반응 유전자라도 있는 것일까? 임신중지 약물은 이미 세계 100여개국에서 사용이 허가됐고 WHO가 필수의약품 목록에 올렸으며, 2019년부터는 ‘핵심’ 필수의약품으로 지위를 격상했다. 이미 고소득 국가에서는 임신중지의 절반 이상이 내과적 방법으로 이루어지며, 북유럽 국가에서는 그 비중이 90%에 달한다.
2019년 헌재 판결 이후 국회에서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여러 번 발의되었지만 본회의까지 간 적이 없다. 내란 세력이 집권하든 민주주의 세력이 집권하든 변함이 없다. 예전에는 국회의 이런 소극적 자세가 우익 종교 세력의 압력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어렵다는 의사 증원도, 검찰개혁도 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모자보건법 개정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과제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외부 압력이 아니라 어쩌면 스스로의 종교적 신념 자체가 문제일지 모른다는 합당한 의심에 이르렀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자체 집계에 의하면 22대 국회의원 중 개신교, 천주교 신자 비중은 각각 29%와 27%에 달한다. 일반 시민들의 비중 20%, 11%보다 훨씬 높다. 개신교는 차별금지법과 임신중지 관련 법안을 ‘악법’으로 콕 찍으며 국회의원들이 그 방파제가 되어달라고 공개적으로 호소해왔고,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가톨릭마저도 임신중지에 대해서는 강경하다. 성경에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구체적 언급이 없고, 임신중지 반대가 기독교의 2000년 전통이 아닌데도 말이다.
인류가 직면한 수많은 난제들 중 임신중지 문제가 첨예한 ‘정치적’ 쟁점이 된 것은 1970년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 열성적 노력 덕분이다. 이 시기에 한국은 출산 억제를 위해 국가가 사실상 임신중지를 장려했고, 기독교는 지금과 같은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수입된 정치적 떡밥을 마치 신탁이라도 되는 양 따르고 있을 뿐이다.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니 국회의원이 하나님을 믿든 하느님을 믿든, 아니면 단군왕검이나 관운장을 섬긴다 한들, 나로서는 알 바 아니다. 하지만 개인의 종교적 신념보다는, 시민의 건강권 보장이라는 입법기구로서의 공적 책임을 우선시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니니 얼른 이 문제를 해결하고, 글로벌 경제·안보 위기 같은 진짜 어려운 문제들에 매진하라고 국회에 말하고 싶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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