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착즙하는 항암 식단

김도미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저자 2026. 4. 1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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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치유’라는 세계가 있다. 나는 암 진단과 동시에 이 광활한 세계에 떨어졌다. 겁먹은 내 머리 위로 나를 사랑하는 이들의 음성이 들렸다. “암 환자는 잘 먹어야 한다!” 음성은 곧 숯덩어리 형상의 버섯, 닭발곰탕, 슈퍼푸드를 찬양하는 노래가 되어 공중에 울려 퍼졌다. 나는 소심하게 반항했다. “저는 감염 위험도 크고 간도 약해져서 그런 걸 먹을 수 없어요.” 가사가 바뀌었다. 콩, 브로콜리, 토마토, 마늘… 나는 끝내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건 그냥 골고루 먹는 거잖아요!”

고개를 들자 녹즙기와 약탕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탑이 보였다. 그것들은 맹렬하게 돌아가며 총천연색의 즙을 짜냈다. 나는 엉겁결에 빨간 주스가 담긴 유리컵을 받아 들었다. 사람들이 내 주위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비트와 당근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컵을 던지고 골목으로 도망치자, 비범한 풍모의 사람들이 길을 막고 마른 뿌리 조각을 내밀며 말했다.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다시 대로변으로 달려 나왔다. 곳곳의 전광판에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칭찬하는 항암 식단 레시피가 상영되고 있었다.

이 세계의 출구를 찾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당신이 방금 이 세계에 입장한 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필 당신을 아끼는 사람은, TV의 건강 정보 프로그램과 홈쇼핑 프로그램의 애청자일 가능성이 높다. 혹여 항암치료의 부작용이 궁금해 병명을 검색해 보았다면 알고리즘이 틀어질 것이다. 당신의 동영상 플랫폼 계정에는 의사나 약사, 병원의 영양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항암 효과가 있는 음식과 암을 유발하는 음식을 알려줄 것이다.

‘기적의 항암 음식 10가지’ ‘입도 대지 말아야 할 암 유발 음식’ 등등. 과학을 부정하기도 하고 근거로 하기도 하는 별의별 영양학, 누구는 약이라 하고 누구는 독이라 하는 정보들이 자웅을 겨루며 넘실거린다. 시간과 지갑을 몽땅 갈아 짜내어 ‘잘’ 해먹더라도, 당신의 밥상이 미흡하거나 그릇되었다고 훈수를 두는 사람이 꼭 한 명 이상은 나타난다. 가련한 뉴페이스는 곧 길을 잃고 만다.

그래도 메시지 하나는 남는다. “당신이 즐겨 먹은 음식들이 암을 일으켰어요.” 다시 말해, 앨범 앱을 가득 채운 과거의 밥상 사진들은 참회해야 할 범죄 현장이고, 투병은 분골쇄신의 자세로 나를 거둬 먹여야 하는 생의 마지막 미션이다. 암 환자의 식생활은 정보의 옥석을 판단하고 성취해야 하는 자기계발 프로젝트가 된다. 모범 생존자의 치유 철학이 망망대해의 끝에 북극성처럼 빛난다.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어요, 저를 보세요.’ 그렇다면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자기계발 프로젝트의 실패자들이란 말일까. 이 세계의 문법에 따르자면 그렇다. 암 치유라는 세계에서 유순한 암 경험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물론 자신을 돌보는 마음이 이 세계에서 솟아나기도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평생을 가족에게 헌신한 어머니뻘 여성들의 이야기를 병실 침상에서, 진료실 앞 대기석에서 듣곤 했다. 그들은 자신이 이제야 깨달은 지혜를 전해주고 싶어 했다. “이참에 잘 먹으라고 아픈 거니까, 잘 먹고 나아요.” 암은 그간의 노고를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었고, 정성껏 해다 먹는 일은 뒤늦은 보상이었다. 나는 그들이 다시 얻을 삶만큼은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내게 전하려 했던 진심을 깊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미디어로 혹은 구전으로 과잉 대표된 ‘암 치유’ 세계를 벗어나면, 세상에는 그럴 여력이 없거나 그럴 의사조차 없는 다양한 암 경험자들이 있다. 아마 나도 그들 중 일부일 것이다. 내가 먹은 것이 암을 만들었다고 질책한들, 맛있는 밥상과 걸쭉한 술상을 홀로 또는 여럿이 나눈 시간이 내 생에 없었기를 바라지 않는다. 잘 먹고 잘 놀았던 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즐겁게 해주었던 과거를, 변함없는 나의 식탁을 참회하지 않는다.

김도미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저자

김도미 <사랑과 통제와 맥주 한잔의 자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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