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AI 붐이 촉발한 반도체 시장의 유례없는 활황 HBM 공급 병목, 수요 폭증에 생산은 역부족 투자 쏟는 빅테크, 수익성 검증이 최대 변수 한은 "내년 이후 불확실성"... 호황 퇴조 가능성
[지데일리] 세계 경제의 판세를 뒤흔드는 ‘AI 붐’이 반도체 시장에 전례 없는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발하며 한국 기업들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하는 가운데, 한국은행은 “이번 확장 국면은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AI 투자 붐에 힘입어 반도체 시장이 사상 최대 호황을 맞았다. 한국은행은 공급 제약을 고려할 때 내년 상반기까지 확장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지만, AI 투자 수익성 둔화와 빅테크의 자금난 등 불확실성이 호황의 향방을 좌우할 것으로 내다봤다. ⓒ픽사베이
그러나 이 화려한 흥행 뒤에는 ‘AI 투자 수익성’이라는 불안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돈을 쏟아붓는 빅테크들이 언제쯤 실제 수익을 실현할 수 있을지, 그때까지 자금줄을 무리 없이 유지할 수 있을지가 반도체 호황의 운명을 가를 결정적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행은 12일 발표한 '글로벌 반도체 경기 확장세 지속가능성 점검' 보고서에서 공급 제약 등을 고려할 때 내년 상반기까지 반도체 사이클의 확장세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반도체 수요는 거의 전적으로 AI 인프라 투자에 기댄 상태다. 미국을 중심으로 초대형 데이터센터 건설이 잇따르며, 인공지능 학습과 추론을 위한 GPU 서버에 탑재되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범용 D램 수요가 급증했다.
이 같은 폭발적 수요 덕분에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역대 최대인 57조 원 넘는 영업이익을 올렸고, SK하이닉스도 40조 원 대 실적이 예상된다. 반도체 업계는 그야말로 ‘황금기’를 맞은 모습이다.
하지만 공급 측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HBM은 공정 난이도가 높아 생산라인을 확보하고 양산에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시설 확충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급증하는 글로벌 수요를 소화하기엔 역부족이다.
보고서는 “이번 확장세는 공급 제약으로 인한 수급 불균형이 과거보다 크고 길어지는 특징을 보인다”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수요가 앞서 달리고 공급이 뒤쫓는’ 비정상적 구조가 형성된 모습이다.
한은은 그러나 이 호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매우 유동적’이라고 선을 그었다. 가장 큰 변수는 AI 투자의 수익성이다. 보고서는 “시장 관심이 기술력 확보에서 실제 수익화로 옮겨갈 것으로 예상되는 내년 이후에는 AI 인프라 투자가 현재 수준으로 확대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오픈AI, 앤트로픽, 구글, 아마존 등 주요 AI 기업들은 지금까지 ‘패권 선점’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왔으나, 수익화 속도가 기대보다 느려질 경우 투자 열기가 빠르게 식을 수 있다. 즉, 반도체 수요의 버팀목인 AI 투자가 꺼지면 현재의 고성장은 순식간에 냉각될 수 있다.
빅테크의 자금 사정은 이미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막대한 인프라 지출이 누적되면서 내부 현금흐름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한은은 보고서에서 “AI 인프라 투자 확대 이후, 주요 빅테크들은 자사주 매입을 축소하고 회사채 발행을 크게 늘렸다”고 지적했다. 이는 현금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는 뜻으로, 투자 지속 여부가 외부 자금 조달 여건에 직접적으로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 금리의 불확실성과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진다면 자금줄이 마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술 혁신도 변수다. 훨씬 적은 메모리를 쓰면서 동일한 연산 성능을 구현하는 기술이 현실화되면 메모리 반도체의 수요 기반은 흔들릴 수 있다. 구글이 최근 공개한 ‘터보 퀀트(TurboQuant)’ 기술은 그 대표 사례다.
보고서는 “메모리 절감 기술이 상용화되면 이미 투자된 설비의 수익성도 악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메모리 사용 효율이 비약적으로 높아질 경우 현재의 폭발적 메모리 구매 흐름이 급격히 둔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한국 기업들의 증설 속도, 중국 메모리 제조사의 기술 추격, 글로벌 정세 등도 반도체 사이클을 흔들 변수로 꼽혔다. 특히 중국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반도체 자급률을 높이고 있어, 공급 시장의 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미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면서, 한국 기업들은 투자 확대와 기술 혁신이라는 이중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도 무시할 수 없다. 한은은 미국과 이란 간 갈등이 당장 반도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전쟁 장기화나 금융경제의 불안 확산 시 AI 투자 수익성 검증 시점이 앞당겨지거나 빅테크의 자금 확보에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불확실성이 커지면 투자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그 여파는 곧바로 반도체 수요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AI가 이끄는 반도체 호황은 ‘투자의 과열’과 ‘수익의 불확실성’이라는 이중 리스크 위에 놓여 있다. 지금은 빅테크의 막대한 자금이 반도체 생태계를 지탱하고 있지만, 투자 규모가 유지되지 못할 경우 그 호황은 예상보다 빨리 식을 수도 있다.
한은의 진단대로, 내년 상반기까지는 열기가 이어지겠지만 그 이후 반도체 산업이 견조한 성장궤도를 유지할지 여부는 AI 시장의 수익 실현 속도와 글로벌 자본시장 안정성에 달려 있다는 시각이 보편적이다. 산업의 심장은 여전히 뜨겁지만, 그 박동이 멈출 때의 충격은 결코 작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