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예향] 천천히 즐기는 슬로시티의 봄

광주일보 2026. 4. 12.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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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에 설치된 달팽이 조형물. <완도군>
달팽이는 서두르지 않는다. 작은 집을 등에 지고 천천히 길을 간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그 걸음처럼 남도의 봄도 그렇게 흘러간다. 바다 위 섬길에서 숲길을 지나 돌담 마을까지, 속도를 조금 늦추면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바다 위를 걷는 섬, 청산도 슬로길

청산도에 들어서는 순간 여행의 리듬이 달라진다. 배에서 내려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걷다 보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낮은 돌담과 완만한 구릉, 바다를 향해 이어지는 길과 계단식 논이 어우러진 풍경은 도시와는 다른 시간을 느끼게 한다. 바닷바람이 천천히 불어오는 청산도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늦추게 된다.

완도군 청산면에 위치한 청산도는 2007년 아시아 최초로 국제 슬로시티(Cittaslow)로 지정된 곳이다. 슬로시티는 빠른 개발과 효율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자연과 전통, 공동체의 리듬을 지키며 살아가는 도시를 의미한다. 청산도는 그 취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 가운데 하나다.

돌담이 이어지는 청산도 마을 풍경. <완도군>
돌담이 이어지는 마을 풍경, 구들장 논과 전통 어촌의 삶, 섬 특유의 고요한 자연환경이 어우러지며 ‘느리게 사는 삶’의 가치를 보여준다.

섬을 대표하는 풍경은 역시 ‘청산도 슬로길’이다. 바다와 산, 마을을 잇는 11개 코스 42.195㎞로 이어진 이 길은 길이 지닌 풍경, 길에 사는 사람, 길에 얽힌 이야기와 어우러져 거닐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돌담길과 낮은 언덕, 바다를 향해 이어진 길을 걷다 보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멀리까지 향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돌담 위에 내려앉은 햇빛, 멀리 들리는 파도 소리가 걸음의 속도를 절로 느리게 만든다.

봄이 시작되는 시기에는 섬의 색도 조금씩 달라진다. 계단식 논과 마을 주변으로 연둣빛이 번지고, 길가에는 노란 유채꽃이 피면서 섬 전체가 부드러운 색으로 바뀌어 간다. 바다를 따라 이어지는 길을 걷다 보면 푸른 바다와 노란 꽃, 돌담이 어우러진 청산도의 대표적인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4월 한달간 청산도에서는 슬로걷기 축제가 열린다. <완도군>
이 시기 청산도에서는 슬로걷기 축제도 열린다. 매년 4월 한달 동안 진행되는 축제는 ‘느림의 섬’이라는 청산도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행사다. 올해도 4월 1일부터 30일까지 청산도 일원에서 펼쳐지고 있다. 서두르지 않고 걷는 여행, 길 위에서 잠시 멈춰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이 축제의 가장 큰 매력이다.

청산도의 길은 화려하거나 대단한 풍경을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낮은 돌담과 오래된 마을, 바다와 논이 이어지는 평온한 풍경 속에서 사람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낮춘다. 천천히 걷는 여행, 잠시 멈춰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 청산도는 그렇게 남도의 봄을 가장 느린 속도로 시작하게 한다.

청산도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배를 타야 한다. 완도항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을 타고 50여 분 정도 바다를 건너면 섬에 닿는다. 하루 여러 차례 배가 오가지만 계절과 날씨에 따라 운항 시간이 달라지기 때문에 미리 시간표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숲이 길이 되는 곳, 장흥 편백숲

장흥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 숲속 조형물 풍경. /최현배 기자
청산도가 바다 위에서 느림의 시간을 보내는 섬이라면 장흥은 숲에서 속도를 낮추는 곳이다. 장흥은 오래전부터 ‘슬로시티’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행정구역으로는 유치면이 슬로시티로 지정돼 있지만 장흥의 느린 시간은 특정 마을보다는 군 전체의 자연 풍경 속에서 느껴진다. 산과 강, 숲이 이어지는 장흥의 길은 사람을 천천히 걷게 만든다.

장흥읍 시가지를 지나 억불산 자락으로 들어서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번잡한 도심의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고 숲의 기운이 먼저 전해진다. 이곳에 자리한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는 장흥을 대표하는 숲 산책 공간이다. 억불산 북쪽 기슭을 따라 조성된 숲은 수십 년 동안 자란 편백나무 군락이 넓게 이어지며 장흥의 대표적인 치유 숲으로 알려져 있다.

편백숲을 걷는 이유는 단순히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편백나무는 ‘피톤치드’라는 천연 향균 물질을 많이 내뿜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숲에 들어서 깊게 숨을 들이쉬면 특유의 상쾌한 향이 느껴지면서 스트레스 완화와 심리 안정에 도움을 받는다.

장흥 우드랜드 말레길 하늘데크. /최현배 기자
숲길에 들어서면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톱밥을 깔아놓은 산책로는 푹신해 발에 부담이 적고 발걸음 소리마저 부드럽게 흡수한다. 숲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과 편백 향이 어우러지면서 공기가 한층 맑게 느껴진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숲의 분위기가 온몸으로 전해진다.

우드랜드에는 숲을 조금 더 천천히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 공간도 마련돼 있다. 편백 향이 가득한 ‘향기원’에서는 숲의 향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고, 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놓인 목조각공원은 숲과 예술이 어우러진 풍경을 만들어낸다. 빛과 함께 걷는 편백숲 밤산책 ‘워크노벨’도 이곳의 특징적인 공간 가운데 하나다.

맨발로 걸을 수 있는 황토맨발길도 조성됐다. 흙의 촉감을 발로 직접 느끼며 걷는 길로, 천천히 걸을수록 몸의 긴장이 풀리는 느낌을 준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편백숲 족욕장도 나타난다. 여행객들은 이곳에서 잠시 발을 담그며 쉬어 간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숲을 바라보는 시간은 짧지만 여유로운 쉼을 만들어준다.

장흥 우드랜드 말레길 톱밥산책로. /최현배 기자
우드랜드의 또 다른 매력은 말레길이다. 숲 속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중간중간 데크로 연결되며 편백나무 사이를 높이 지난다. 나무 아래를 걷는 길과 달리 데크길에 올라서면 키 큰 편백나무와 눈높이를 맞추며 걷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숲의 향기가 함께 따라오는 길이다.

장흥의 숲길은 천천히 걸을수록 편안해지는 길이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 발밑에서 부드럽게 느껴지는 톱밥 산책로, 숲 깊은 곳에서 퍼지는 편백 향이 여행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낮춘다. 바다와 섬의 풍경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남도의 봄을 열어준다.

◇돌담길 따라 걷는 마을, 창평 삼지내

산수유 꽃이 내려앉은 창평 삼지내 마을 돌담길. /최현배 기자
장흥의 숲길을 지나 담양 창평으로 향한다. 창평면은 2007년 국제 슬로시티로 지정되며 한국 슬로시티 운동의 출발점이 된 곳이다. 돌담과 고택이 이어지는 이 마을에서는 ‘느림’이 생활의 방식처럼 이어진다.

창평 삼지내마을은 500여 년 역사를 지닌 고씨 집성촌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돌담이 이어지는 골목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담장은 높지 않지만 길을 따라 차분하게 이어지며 마을의 분위기를 만든다. 골목은 부드럽게 굽어 이어진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또 다른 담장과 마주하는 풍경이 신기하다. 기와지붕이 낮게 이어진 집들은 차분한 풍경을 만든다.

대문 앞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글귀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는 집도 보인다. 오래된 집이지만 마을의 시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택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고, 때론 한옥 민박이나 한옥 카페로 바뀌어 여행객들에게 문을 열어두기도 한다.

삼지내마을 인근 남극루 일대에서는 전통정원공원 조성도 진행 중이다. 전통정원과 체험 공간이 들어설 예정이어서 앞으로 창평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또 하나의 산책 공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돌담과 한옥이 이어진 삼지내 마을 전경. /최현배 기자
봄이 시작되는 시기에는 골목 풍경도 한층 밝아진다. 담장 너머로 산수유의 노란 꽃이 먼저 얼굴을 내민다. 이어 매화와 목련이 피고 마을 주변에서는 벚꽃도 피어난다. 돌담과 기와지붕 사이로 조용히 피어나는 꽃들이 마을의 봄을 부드럽게 채운다.

창평을 걷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는 것이다. 마을 입구에서 골목 하나를 따라 들어가고 다시 다른 골목으로 천천히 방향을 바꾸며 걸으면 된다. 담장 끝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고 그 길 끝에서 또 다른 골목이 이어진다. 걷다 보면 오래된 우물이나 작은 정자 같은 마을 풍경을 만나기도 한다.

삼지내마을의 매력은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신 천천히 걸을수록 풍경이 보인다. 담장 위로 고개를 내민 꽃, 오래된 기와지붕, 담장 아래 작은 도랑에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걸음을 붙잡는다. 빠르게 둘러보는 여행보다 천천히 머무는 여행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이보람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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