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촛불집회에 10만명 몰린 이 나라...트럼프 비호에도 정권 퇴진 열기 '후끈'
"정권 타파 콘서트" 촛불집회에 10만 명
젤렌스키 등장한 흑색선전 포스터 도배
트럼프·푸틴도 '오르반 총리 구하기' 가세
물가상승·부패로 여론조사서 야당이 앞서
결과는 안갯속, 투표율 역대 최대치 전망

“더러운 피데스, 당장 몰아내자!”
헝가리 총선을 이틀 앞둔 10일(현지시간) 오후 7시 수도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 헝가리판 촛불집회라 할 수 있는 ‘정권 타파 콘서트’에 모인 시민 수만여 명이 16년간 집권한 오르반 빅토르(62) 총리와 여당 피데스를 비판하며 “이번 총선에서 끌어내자”는 구호를 외쳤다. 헝가리어를 모르는 기자조차 ‘더러운 피데스’를 뜻하는 “모츠코쉬 피데스(Mocskos Fidesz)”가 귀에 박힐 정도로 부다페스트 전역에 해당 구호가 울려 퍼졌다.
AP통신은 오르반 정권 독재 종식을 바라는 가수 50명이 기획한 이 콘서트에 7시간 동안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고 보도했다. 헝가리 전체 인구가 960만 명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다. 최근 군 내부 비리를 폭로한 실베스터 팔린카스 대위가 군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자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현장에서 만난 사볼치(24)는 “젊은이들은 이번 선거를 헝가리 민주화를 위한 마지막 기회로 보고 있다”며 “오르반이 또 집권에 성공하면 이 나라를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푸틴도 뛰어든 선거

‘1990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헝가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거’라는 평가에 걸맞게 현지에선 오르반의 5연임을 저지하려는 시민들과 이를 사수하려는 친정부 세력 간에 총력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1998~2002년에 이어 2010년부터 16년간 연임하며 승승장구했던 오르반의 재집권에 빨간불이 켜졌기 때문이다. 한때 오르반과 피데스당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변호사 출신 마자르 페테르(45)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한 것. 2024년 오르반 정권 비리에 반발해 중도 우파 티서당에 합류, 대표가 된 마자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오르반이 이끄는 피데스당의 지지율을 크게 앞서고 있다. 외신은 투표율이 80%를 넘어 역대 최대치를 찍을 것으로 전망했다.
오르반 지원군을 자처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과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7일 JD 밴스 부통령을 부다페스트에 급파해 유세를 돕도록 했다. AP는 “이번 선거는 트럼프의 국제적 영향력을 가늠할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유럽연합(EU) 내 우군인 오르반의 재집권을 위해 정보 기관을 동원, 여론 공작에 나섰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반대로 유럽 당국자들은 우크라이나 지원 등 EU 의사결정에 매번 거부권을 행사하는 오르반의 낙마를 바라고 있다. 인구 1,000만 명이 안 되는, EU 국내총생산(GDP)의 1.1%에 불과한 헝가리 총선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다.
50m마다 젤렌스키 흑색선전 포스터

지지율 열세인 오르반은 흑색선전으로 뒤집기를 시도했다. 경쟁자인 마자르를 EU와 우크라이나의 앞잡이로 묘사하는 선거 포스터를 헝가리 전역에 뿌렸다. 마자르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사진을 나란히 붙여 놓고 “위험한 이들을 막자”는 문구를 넣었다. 야당이 집권하면 헝가리 청년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될 것이라는 공포심을 조장한 것이다. 반대로 오르반이 등장한 포스터에는 “전쟁에 맞서 함께 단결하자”는 구호를 담았다.
부다페스트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동안 창밖에서 쉴 새 없이 봤던 이 포스터를 시내에선 50m마다 한 번꼴로 접했다. 직장인 빅토리아(46)는 “관광객들이 이 혐오스러운(disgusting) 포스터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낯 뜨겁다”고 말했다. 변호사 마테(26)는 “길거리에 프로파간다가 이렇게 판치는 나라가 또 있느냐”며 “기업도, 언론도 모두 오르반 손아귀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시내를 도배하다시피 한 여당 광고판과 달리 드문드문 보인 야당 포스터는 B4 용지 크기에 불과했다. 정부 예산을 총리 마음껏 쓸 수 있는 헝가리 선거는 여당에 일방적으로 기운 운동장이다.

오르반은 2010년 재집권 이후 의석수를 199석으로 줄이고 여당에 유리하도록 선거구와 선거법을 바꿨다. 사법부는 충성파들로 채웠고 언론도 장악했다. 부정부패로 부를 축적했지만 감시 세력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물가는 치솟았고 시민들은 저임금에 시달렸다. 벤체 벤(60)은 “돈을 적당히 빼돌렸다면 재집권에 성공했을지 몰라도 부패 규모가 엄청나다”며 “트럼프 약발도 선거에 먹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르반이 트럼프의 꼭두각시인 걸 알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론조사에선 야당이 앞섰지만 결과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여당이 자원을 총동원한 만큼 그 영향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실제 그의 전쟁 공포론은 일부 통하는 분위기였다. 여당은 11일 부다페스트 명소인 성삼위일체 광장에서 지지층을 총결집한 마지막 유세를 했다. 당원을 대거 동원한 이 행사에서 지지자들은 “오르반, 피데스”를 연호했다. 독일과 헝가리 이중국적자로 사전 우편 투표를 마쳤다는 모니카(44)는 “독일이 이민 문제로 망가지는 걸 보면서 반이민 정책을 펼치는 오르반을 뽑았다”고 말했다.
헝가리 총선 투표는 12일 오후 7시(한국시간 13일 오전 2시)에 종료되며 결과는 이르면 2, 3시간 내에 나올 전망이다.
부다페스트= 정승임 특파원 cho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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