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던 잡색 플라스틱도 갈아서 재활용…포장비닐까지 수거 … 중기 '눈물의 사투'
PP·PE 수급난에 가격도 급등
생존위기 中企, 원료 확보 사활
PVC 패널 자투리까지 모아 써

경기 시흥에서 화장품 및 욕실제품용 펌프를 생산하는 B사는 예전에는 폐기하거나 헐값에 팔았던 '잡색'까지 재활용하며 원료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잡색이란 온갖 색깔이 섞인 플라스틱으로 상품가치가 떨어져 종전에는 폐기물로 분류됐던 제품이다. B사 공장장은 "최근 잡색을 분쇄한 뒤 첨가제를 넣는 컴파운딩 과정을 거쳐 재생 원료로 사용하는 지경에까지 왔다"며 "이마저도 양이 많지 않아 이달 원료 확보가 안 되면 최악의 경우 생산·수출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폴리프로필렌(PP)은 그나마 폴리에틸렌(PE)보다는 상황이 나은 편이다. 5월분까지 재고가 확보돼 있는데, 전쟁이 터지자마자 발 빠르게 나서 대체 원료를 찾은 덕분이다. B사 공장장은 "중동 사태가 터지자마자 국내 화학 대기업에 물성이 같은 대체 원료를 요청했는데, 샘플 실험을 거친 끝에 이달 초에야 확보할 수 있었다"며 "그래도 물량이 부족해 중국·대만 쪽 수급처를 알아보고 있는데 쉽지 않다"고 밝혔다.
PP, PE, PET(폴리에스터) 등 석유화학 제품의 수급 불안정 파장이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중동 전쟁은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원료 확보를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원료 재활용이나 대체 원료 탐색, 심지어 기존 제품 수거 등으로 공급망 교란 상황을 버텨내고 있다.
인쇄회로기판(PCB)을 생산하는 수도권 소재 중소기업 C사는 일일이 고객사를 찾아가 제전 비닐을 회수하고 있다. 제전 비닐은 정전기 발생을 막는 용도로 전자 부품이나 PCB 등 제품 보호용 포장재로 쓰인다. 이 비닐을 만드는 주원료는 PE나 PET 등이다. C사 관계자는 "제전 비닐 제조업체에서 4월 말 이후 공급이 무기한 불가하다는 공문을 받았다"며 "평소 2개월분 재고를 쌓아두는데 5월 말부터 문제가 될 것 같아 부득이하게 회수에 나섰다"고 말했다. 그는 "제전 비닐을 쓰지 않으면 정전기 때문에 내부 회로가 타는 등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대체재도 없다"며 "회수한 제전 비닐을 세척해 재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찾은 시흥 반월국가산업단지의 아크릴 소재 부품 제조업체 D사는 평일 일과 시간에도 한산한 모습이었다. 직원 두 명이 가공기계인 라우터를 이용해 10㎜ 두께의 PVC 원장(가공 전 단계의 원판)을 절단하며 기계용 덮개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업체 대표는 "반월산단에는 기계·금속 업체가 많아 합성수지 소재 부품과 기계 커버 제작 의뢰를 주로 받는데, 소재를 구하기가 어려워져 일감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원재료 가격만 오른 게 아니라 물량 확보도 어려워져 이제는 판매처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재고를 확인하고 있다"며 "가로 1600㎜, 세로 2400㎜ 크기의 원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했다. 이어 "예전에는 원장을 가공하고 남은 자투리 소재를 버렸지만 지금은 이것마저 나중에 쓸 용도로 따로 보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석화 원료 확보에 애를 먹는 페인트 업계는 다음달부터 생산량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주요 페인트 업체에서는 원재료별로 짧게는 2주, 길게는 6개월가량의 안전 재고를 보유해 왔으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재고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탓이다. 한 페인트 업계 관계자는 "현재까지는 최소 필요 수준은 유지하고 있지만 원재료 공급사별로 생산량이 대폭 줄고 배정 물량도 점점 쪼그라들고 있다"며 압박감을 전했다.
페인트에는 막을 형성하고 표면에 잘 붙게 하는 수지, 이 수지를 녹여 액체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용제, 색상을 만드는 안료, 건조 속도를 조절하는 첨가제 등 네 가지 핵심 재료가 쓰인다. 이 중 수지·용제·안료는 대부분 석화 제품에서 얻는다. 나프타를 분해해 얻은 합성수지와 유기용제는 전체 원가의 50~70%를 차지한다. 원재료 가격은 최근 수지류가 평균 30~40%, 용제류는 50~60% 인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수급이 어려운 품목은 가격이 80~100%까지 오르기도 했다.
인쇄 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 중구 을지로 인쇄거리에서 40년째 라벨과 스티커 등 특수인쇄업을 하는 E사 대표는 "전쟁 전에는 주문 후 하루이틀이면 받던 PP 등 자재를 요즘은 일주일에서 열흘씩 먼저 주문하지 않으면 고객 주문에 맞춰 즉각 대응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분야에도 피해가 가시화되고 있다. 국내 반도체 기업에 공정용 센서를 납품하는 수도권 소재 F사 대표는 "은 소재 특수 원자재 가격이 1㎏당 기존 8만원에서 38만원으로 5배 가까이 뛰었지만 납품 가격 인상을 요청하지 못해 속앓이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흥 서정원 기자 / 이윤식 기자 / 서울 양세호 기자 /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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