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주주대표소송 '1호 타깃' 나오나
소송 주체 기금본부로 일원화
정부 스튜어드십코드 강화 기조
기업 ESG 대응 체계 다시 짜야
국민연금이 사실상 사문화한 주주대표소송 제도를 다시 꺼내 들었다. 국민연금은 2019년 주주대표소송 기준을 마련한 이후 한 번도 이를 실행하지 않았는데, 올해부터 이를 가동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시장은 공정거래위원회 제재를 받았거나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한 기업 중 ‘1호 타깃’이 나올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1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대표소송 관련 가이드라인 개선 작업을 하고 있다. 주주대표소송이란 회사가 이사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하지 않을 경우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이사에게 책임을 묻는 제도다.
보건복지부 산하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지난달 회의에서 대표소송 제기 판단 주체를 원칙적으로 기금운용본부로 일원화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지금까지는 판단 주체가 기금운용본부와 외부 전문위원으로 꾸려진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에 분산돼 있었다. 업계 관계자는 “의사결정 구조를 정리해 실제 제소로 이어지는 실행력을 높이겠다는 취지”라며 “주주대표소송 제도를 실제로 쓰겠다는 큰 그림 아래 이뤄진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소송 검토 대상도 확대한다. 현재는 법령을 위반한 기업이 검토 대상인데 앞으로는 ‘기업과의 대화’를 진행 중인 기업으로 넓힌다. ‘기업과의 대화’는 국민연금이 배당정책, 법령 위반 우려, 기후변화, 산업안전 등 중점관리 사안이 있는 투자기업을 상대로 비공개 서한이나 면담을 통해 자발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수탁자책임 활동이다.
가이드라인이 이처럼 바뀌면 국민연금이 더욱 활발하게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지금까지는 비공개 서한 발송과 면담, 주주총회 반대 의결권 행사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사 개인에게 민사상 책임을 묻는 사례가 많아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후속 논의를 거쳐 올 상반기 열리는 기금위에서 최종안이 의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국민연금은 2018년 7월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 책임 원칙) 도입을 선언한 뒤 이듬해 관련 지침에 대표소송 기준을 담았다.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을 훼손한 이사의 책임을 회사 대신 추궁해 기업가치와 장기 수익률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실제 소송은 단 한 건도 없었다. 대표소송이 정치적 논란을 부를 수 있는 데다 패소할 경우 ‘국민연금 책임론’이 불거질 수 있다는 이유다. 한국 소송 구조상 회사 내부 자료를 폭넓게 확보하기 어려워 입증 부담도 컸다.
최근 들어 국민연금이 이 카드를 다시 꺼낸 것은 정부의 스튜어드십코드 강화 기조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3월 이재명 대통령 주재로 열린 자본시장 안정과 정상화 간담회에서도 정부는 자본시장 체질 개선 과제 가운데 하나로 기관투자가 감시 기능 강화를 위한 스튜어드십코드 내실화를 제시했다. 과거처럼 반대 의결권 행사에 그치지 말고, 주주가치 훼손 행위에 대해서는 실제 책임까지 물어야 한다는 정책 기조에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해석이다.
산업계는 누가 ‘1호 타깃’이 되느냐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국민연금이 이미 ‘기업과의 대화’를 진행하고 있는 기업 가운데서 나올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국민연금은 이들 기업을 상대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국민연금이 기업과의 대화로 진행한 비공개 면담은 2024년 208건에서 지난해 240건으로 늘었는데, 서한 발신은 40건에서 19건으로 줄었다. 국민연금이 서면 경고보다 직접 면담 중심으로 압박 강도를 끌어올렸다는 의미다.
업계는 첫 번째 대표소송 대상이 법적 쟁점이 상당 부분 정리된 곳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공정위가 부당 지원이나 사익편취로 제재했고, 해당 기업이 불복해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최종 패소한 사건이라면 위법성과 회사 손해를 입증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첫 번째 소송에서 패소하면 제도 전체의 명분과 동력이 흔들릴 수 있는 만큼, 국민연금도 상징성보다 승소 가능성을 더 중시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 자본시장 전문가는 “국민연금이 첫 번째 소송을 내는 순간 대표소송은 상시 경영 리스크가 된다”며 “한 번 물꼬가 트이면 이후엔 개별 기업의 평판 문제가 아니라 자본시장 전반의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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