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창과 명고수 그리고 명청중이 만드는 전통 소리 마당 [경남 무형유산을 찾아서]
동편제 맥 잇는 사천 <수궁가>
보유자 후보에 손양희·이윤옥
소리판 지휘하는 고수 중요해
강성인·이용희 보유자 후보로
청중 호응으로 완성되는 특징
현대적 콘텐츠로 창작하기도

교과서와 여행안내서, 미디어를 통해 자주 보게 되는 국가유산은 이미 상식처럼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지역으로 시선을 돌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경상남도에만 모두 41건의 무형유산이 지정돼 있다. 하지만 이름과 내용, 그것을 지켜온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지역 유산을 조명하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고, 그때마다 '기록의 필요성'과 '계승의 위기'가 이야기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관심은 쉽게 흩어진다. 이 기획은 단순히 지역 유산을 나열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지역의 시간과 감각 그리고 그것을 오늘까지 이어온 사람들의 현재를 차분히 따라가며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일이다.
"범 내려온다 / 범이 내려온다 / 송림 깊은 골로 / 한 짐승이 내려온다."
지난해 치른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에서 수험생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지문이 출제됐다. 판소리 <수궁가>였다. 이 지문에는 엇모리장단으로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승이 내려온다(후략)"를 읊는 구절이 있었는데, 밴드 이날치가 편곡한 '범 내려온다'를 떠올렸다는 수험생들의 반응이 쏟아졌다. "범 내려온다 / 범이 내려온다"는 구절이 반복되면서 중독성을 일으킨 이 노래는 2020년 한국관광공사의 해외 홍보 유튜브 채널의 영상에 담기면서 우리의 소리를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수궁가> 배경인 사천 비토섬
사천시 서포면 비토리에 있는 비토섬. '토끼가 날아오른 섬'이라는 뜻의 이 섬에는 토끼·거북·용왕이 등장하는 <별주부전>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경상남도 무형유산인 '판소리'도 이 <별주부전>의 원작인 <수궁가>를 연행하고 있다.
판소리는 열두 작품이 전해졌으나 현재는 <수궁가>를 비롯해 <심청가>·<적벽가>·<춘향가>·<흥보가>만이 남아 있다. 이들 작품은 <별주부전>처럼 판소리계 소설로도 전승되고 있다. 이 외 <변강쇠타령>·<배비장타령> 등 창은 잃었으나 소설로 정착돼 내용을 알 수 있는 작품과 <가짜신선타령>처럼 사설·소설로도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작품이 있다.

동편제 맥 잇는 사천
판소리계 소설의 전승이 활발해지면서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는 이본(異本)이 파생되는 현상은 당연했다. 비토섬에서 내려오는 전설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다르게 토끼와 거북의 죽음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비토섬에는 토끼가 달을 보고 뛰어오른 월등도를 비롯해 토끼와 거북, 토끼 아내가 죽어 변한 섬인 토끼섬·거북섬·목섬이 각각 있다.
이본의 발생은 판소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전통적인 판소리 문화권은 우리나라 서남부인 경기 남부·충남·전라도 지역에 해당한다. 그 안에서도 전라도 동북부 지역의 동편제, 전라도 서남부 지역의 서편제, 경기 남부·충남 지역의 중고제로 유파가 나뉜다. 현대의 판소리는 음악적 짜임이나 목의 기교 등이 발달하면서 분화가 심화하고 있다.

명창 못지않게 고수 역할 중요
지난달 29일 사천 선진리성 주차장 일대에서 열린 '2026 사천무형유산축제'. 첫 무대는 손양희 보유자 후보와 문하생들, 고수로는 강성인 판소리고법 보유자 후보가 합작하는 공연이었다. <수궁가> 중 '고고천변'(별주부가 토끼의 간을 구하려고 육지로 가는 도중에 눈앞에 펼쳐진 바다와 산천의 경치를 읊는 대목)이 한판 펼쳐졌다.
"고고천변 일륜홍 (얼씨구) 부상에 높이 떠 / 양곡에 잦은 안개 월봉으로 돌고 돌아 (얼씨구) / 어장촌 개 짖고 회안봉 구름이 떴구나 / 노화는 다 눈 되고 부평은 물에 둥실 / 어룡은 잠자고 (얼쑤) 자고새는 펄펄 날아든다."

고수와 창자는 보완 관계
판소리와 함께 경상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판소리고법'은 고수가 북으로 장단을 쳐 반주하는 것을 이른다. 고수는 창자(노래나 창을 하는 사람)의 내면세계를 깨우치고 소리의 길고 짧음, 높고 낮음, 깊고 얕음을 알아 창자를 유도하고 지휘할 경지에 도달했을 때 명고수로 불린다.
고법 이론은 자세론·고장론·연기론으로 살펴볼 수 있다. 경남에서는 김명환류 이론을 따르고 있다. 이 이론의 특징으로는 왼쪽 무릎 옆에 북을 놓고 친다는 점, 북채를 옆으로 많이 벌리거나 머리 위로 치켜올리는 수법은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는 점, 북통의 꼭대기 가운데를 비롯해 북통을 치는 자리가 3곳으로 고정됐다는 점 등이 있다.

판소리 공연 완성하는 청중
계속해서 사천무형유산축제 현장. 이번에는 이윤옥 보유자 후보가 <수궁가>를 연행한다. 고수로는 이용희 보유자 후보가 나섰다. 이윤옥 보유자 후보는 별주부가 산신제를 지내는 대목을 공연하기에 앞서 "여러분께서 '얼씨구' 해주시면 한번 해보겠다"며 청중의 동참을 권유한다. "얼씨구~"(이윤옥 보유자 후보), "얼씨구~"(청중)
판소리에서 청중은 어떤 역할을 할까. 청중은 창자와 고수의 공연을 감상하면서 소리할 대목을 요구하거나 추임새를 넣는 등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이들의 호응과 추임새 여하에 따라 판의 완성도가 달라지는 바, 판소리 공연을 완성하는 주체라고도 볼 수 있다.

현대적 감각 더한 <수궁가>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가 아니더라도 <수궁가>를 젊은 세대들이 즐길 수 있도록 변용하는 사례는 많아지고 있다. 경남에서는 도지정전문예술단체인 손양희국악예술단이 2024년과 2025년에 선보인 퓨전 창극 <토끼야, 달나라 가자> 시리즈가 있다. 이 공연에서는 <수궁가>를 기반으로 판소리·연기·무용·비보잉·K팝 댄스·트로트 등을 버무려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해 관객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손양희 보유자 후보는 "판소리를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 대중에게 전파하고, 사천만의 특징적인 전통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퓨전 창극을 선보이고 있다"며 "올해도 경남도민예술단 공모사업에 신청해 <토끼야, 달나라 가자> 시리즈를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류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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