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석유 사라"던 트럼프, "호르무즈 합작법인"으로 선회한 이유

“석유는 미국에서 사거나 호르무즈 가서 직접 쟁취하라”며 호르무즈해협 봉쇄 책임을 동맹국에 돌리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번엔 이란과 ‘통행료 사업’ 구상까지 내놨다.
이란을 공격하며 ‘문명 파괴’까지 언급할 정도로 압박수위를 높여가더니 며칠 만에 호르무즈 통행료 사업이 ‘이란 재건’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것이라며 ‘아름다운 일’이라고 응원에 나섰다.
외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8일(현지 시간) ABC뉴스 기자와의 통화에서 호르무즈해협 관리 방식과 관련해 “이란과 합작 투자(조인트벤처) 형태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란이 추진 중인 통행료 부과 구상에 미국이 개입할 여지를 남긴 발언이다.
미국이 ‘최후통첩’을 날린 이후 10시간 만에 이란과 극적인 휴전에 돌입했다. 유가 폭등에 따른 세계경제 충격과 확전 부담을 의식한 결과로 풀이된다. 미국 역시 호르무즈해협 봉쇄의 충격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세계 최대 산유국이지만 항공유와 나프타 등 석유화학 제품의 글로벌 공급망이 붕괴될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미국 수입 항공유 71%는 한국산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를 인질 삼아 다른 나라들의 동참을 압박해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3월 20일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우리는 그 해협을 사용하지 않는다. 필요도 없다. 유럽은 필요하다. 한국, 일본, 중국, 그리고 많은 다른 나라들도 필요로 한다. 그러니 그들이 그 문제에 조금 더 관여해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
트럼프의 발언처럼 미국은 수압 파쇄 기술로 셰일 혁명을 이룬 뒤 하루 약 22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있다. 세계 2위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두 배 수준이다. 호르무즈해협은 세계 원유 수송량의 20%가 통과하는 길목이다. 미국이 하루 소비하는 2000만 배럴의 원유 중 약 50만 배럴만이 호르무즈 길목을 지나 다른 나라로 수입된다.
완벽한 에너지 자립을 이룬 것 같지만 미국 역시 유가 상승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미국은 여전히 하루 60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이는 소비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또 매일 약 4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한다.
특히 캘리포니아주와 같은 서부 해안은 항공유와 경유를 아시아 지역에서 들여온다. 미국석유협회(API)에 따르면 미 서부 해안은 항공유 수요의 약 15~2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85%는 한국산이다.
한국은 2024년 미국 전체 항공유 수입량 중 71%를 공급했다. 호르무즈해협 봉쇄로 한국 정유업체가 충분한 양의 원유를 수입하지 못하면 석유제품 수출 물량도 줄어 이를 수입해 판매하는 미국 기름값까지 높아질 수 있다.
2월 말 전쟁 발발 이후 항공유 가격이 2배 이상 치솟고 곳곳에서 공급이 부족해지자 각국 항공사들은 항공료를 인상하고 운항 편수를 줄이는 등 비상 운영 중이다.
석유화학 시장도 사정은 비슷하다. 미국은 에탄 계열 제품에서 강점을 보이지만 제조업에 필요한 일부 방향족 제품은 해외 조달에 의존한다. 글로벌 정유·화학산업 전문조사기관 ICIS에 따르면 2024년 기준으로 한국은 미국 벤젠 수입량의 46%, 톨루엔 수입량의 57%를 책임지는 1위 공급국이다. 섬유나 페트병의 주 성분인 파라자일렌의 경우 한국이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공급이 많다.
원유 수출국인 미국이 석유제품 수입에서 자유롭지 못한 데는 원유 특성과 정유시설의 구조적 한계가 맞물려 있다. 원유는 점도나 황 함량 등 특성에 따라 크게 경질유와 중질유로 나뉘는데 미국산은 주로 경질유에 치중돼 있다.
묽고 가벼운 경질유는 휘발유나 석유화학의 원료인 나프타를 뽑아내는 데 쓰이고 끈적하고 무거운 중질유는 경유·항공유 생산에 유리하다.
특히 경유의 경우 처리 기술 문제에 환경오염 규제까지 더해져 미국 가격이 한국보다 높게 형성돼 있다. 최근 한국의 2배 가까운 가격이 표시된 캘리포니아주의 주유소 기름값이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 석유·에너지 컨설팅기업인 리포오일어소시에이츠의 앤드루 리포 대표는 최근 해운전문매체 지캡틴에 “일본, 한국 같은 국가들이 석유제품 수출 제한에 동참하면 (미국) 정치인들은 자국 내 공급 확보를 위해 휘발유, 경유, 항공유 재고 비축을 지시할 수밖에 없다”며 “이는 사재기 심리를 확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 중동산 중질유 기준 정유 시설

한국의 미국산 원유 의존도는 현재 약 16% 수준이다. EIA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1억8491만 배럴의 원유를 들여오며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2대 미국산 원유 수입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수치상의 성장세와 달리 현장에서는 미국산 원유 비중을 무작정 늘리기가 쉽지 않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가장 큰 걸림돌은 중동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경제성’이다.
미국산 원유는 중동산보다 운송 거리가 멀어 기간이 길고 운임 부담도 크다. 과거 한국은 중동산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대안으로 삼기도 했으나 전쟁 여파로 수급이 불가능해지자 결국 다시 70% 가까운 물량을 중동산에 의존하게 됐다.
미국산 원유 수입을 한다고 해도 국내 정유 기업의 생산 구조 한계에 부딪힌다. 정유사가 원유를 정제할 때는 중질유와 경질유를 적절히 섞어야 하는데 한국의 정유 설비는 오랜 기간 저렴한 중동산 중질유를 처리하는 데 최적화되어 왔다. 비싸고 맑은 미국산 경질유 비중을 과도하게 늘리면 기존 설비의 효율이 급감해 수익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전 세계가 에너지 자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제조업 중심인 한국에는 쉽지 않은 과제다.
석유는 전기를 만드는 단순한 연료를 넘어 플라스틱, 합성섬유, 고무 등 제조업 전반에 쓰이는 핵심 기초 원료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프타를 기반으로 한 석유화학 산업은 반도체, 자동차 등 한국의 주력 산업과 실핏줄처럼 엉켜 있다. 원유 공급이 흔들리면 산업 전반 생산에도 영향을 미친다.
시장에서는 이번 전쟁이 끝나더라도 에너지·물가·금리 전반에 걸친 구조적 부담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최근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란 전쟁 발발로 전 세계 석유 공급량이 13%가량 감소했다고 밝혔다. 게오르기에바 총재는 종전 이후에도 이미 붕괴된 원유, 가스 공급망을 회복하는 데 수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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