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양행(洋行)의 꿈…美서 성공한 그는 왜 식민지 조선에 왔나 

강현민 기자 2026. 4. 1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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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 유한양행, ‘렉라자’ 韓 최초 美 진출 항암신약
소년시절의 유일한. [사진=유한양행]

【투데이신문 강현민 기자】 보통 성공한 사업가는 더 큰 시장으로 간다. 유한양행 창업자 고(故) 유일한 박사(1895~1971)는 반대로 움직였다. 어릴적 미국으로 건너가 자수성가한 그는 1925년 서른살 젊은 나이에 숙주나물 통조림 사업으로 성공을 거두며 50만달러라는 큰 부를 일궈냈다. 요즘 말로 '꽃길'이 펼쳐질 때 였지만 이듬해 그는 미국 생활을 뒤로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유한양행을 세웠다.

유일한의 이력은 당시 기준으로도 독특했다. 9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낯선 환경에서 성장했고, 학비를 벌기 위해 구두닦이와 신문 배달, 식당 일 등을 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이후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마쳤고,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 세력과도 접점을 가졌다. 사업가로 성장해 가는 과정과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함께 형성된 셈이다.

당시 조선은 전염병과 영양 부족, 각종 질환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약이 필요했지만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시장은 일본 의약품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고, 서민들에게 의약품은 여전히 높은 문턱의 물건이었다. 유일한은 이 현실을 사업 기회로만 보지 않았다. "건강한 국민만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그의 문제의식은, 교육이나 계몽 이전에 사람을 살리는 일이 먼저라는 판단으로 이어졌다.

초기 유한양행의 핵심 사업 모델은 미국산 의약품 수입이었다. 결핵약, 구충제 등 당시 필수적인 약품을 들여와 보급하는 유통업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소사공장을 세우며 자체 생산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점은 단순 유통사를 넘어 제약사로서의 기틀을 마련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후 안티푸라민 등 일반의약품(OTC)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며 성장해 왔다.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를 마치고 행진하는 모습(앞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렉라자'가 연 역수출 시대

유한양행의 100년사는 한국 제약 산업이 수입 의약품 유통에서 신약 원천 기술 보유국으로 이행해온 과정을 대변한다. 사명 '유한양행(柳韓洋行)'에는 '서양(洋)으로 향(行)한다'는 수출 지향적 포부가 담겨 있었다. 초기 미국산 의약품 수입을 통해 국내 보건 자립을 꾀했던 비즈니스 모델은 이제 자체 개발한 기술을 글로벌 빅파마에 역수출하는 고부가가치 구조로 진화하고 있다.

그 전환의 중심에는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렉라자(레이저티닙)가 있다. 2024년 미국 FDA 승인을 획득한 렉라자는 국산 항암제 최초의 글로벌 상업화 사례로 기록됐다. 현재 렉라자는 글로벌 파트너사인 존슨앤드존슨(J&J)의 네트워크를 통해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처방을 확대를 꾀하고 있으며, 여기서 발생하는 10% 이상의 로열티 수익은 유한양행 R&D 투자의 핵심 재원이 되고 있다. 100년 전 유일한 박사가 사명에 담았던 '서양으로 향하는 길'이 21세기, 현실화하고 있는 셈이다.

유한양행은 렉라자의 성공을 발판 삼아 '포스트 렉라자' 확보를 위한 R&D 선순환 구조를 가속화한다는 방침이다. 특정 품목에 안주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항암제 외에도 면역질환, 희귀질환 분야로 파이프라인을 확장하는 추세다.

대표적 후보물질로 꼽히는 레시게르셉트(YH35324)는 기존 치료제 대비 강력하고 지속적인 IgE 억제 효과를 보이는 차세대 알레르기 질환 치료제다. 현재 일본, 중국, 유럽 등을 포함한 다국가 임상 2상을 통해 글로벌 상업적 확장성을 검증하고 있다.

유한양행이 100주년을 맞아 선포한 'Great & Global' 비전은 100년 전 창업자가 꿈꿨던 '양행(洋行)'의 완성이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시작된 약방이 인류의 건강을 책임지는 생명공학 기업으로 진화한 셈이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와 책임 경영, 그리고 글로벌 시장을 향한 도전 정신을 기반으로 앞으로의 100년 또한 'Great & Global'이라는 비전을 현실로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