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한정 특약’ 설명 안 한 신탁사…법원 “설명의무 위반” [이인혁의 판례 읽기]
[법알못 판례 읽기]

아파트나 오피스텔 등 건축물 준공 시점이 분양 당시 약속보다 늦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입주 시기에 맞춰 이사 등 플랜을 세워둔 수분양자(분양 계약자) 입장에선 계획이 꼬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준공일을 맞추지 못한 사업장에서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수분양자들의 소송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부동산 개발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신탁사 등 사업 주체가 자신의 책임 범위를 제한하는 특약을 두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특약이 있다 하더라도 관련 내용을 수분양자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면 사업 주체가 책임을 덜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입주 3개월 초과…분쟁의 씨앗
대법원 제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최근 경남 창원의 한 오피스텔 수분양자 A 씨가 코람코자산신탁을 상대로 제기한 위약금 등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코람코자산신탁은 2018년 3월 B 오피스텔 시행·시공사와 관리형 토지신탁 계약을 체결했다. 관리형 토지신탁이란 신탁사가 프로젝트 시행을 맡으면서 사업비를 위탁자 또는 시공사가 조달하는 방식을 뜻한다. 이를 통해 코람코자산신탁은 B 오피스텔의 시행사 및 분양자 지위를 승계했다.
A 씨는 같은 해 이 오피스텔을 분양받았다. 분양 계약서에는 ‘매수인은 매도인의 귀책 사유로 인해 입주예정일로부터 3개월을 초과해 입주가 지연된 경우 공급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매도인 귀책 사유로 공급계약이 해제되면 매도인이 매수인에게 분양가의 10%를 위약금으로 지급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그런데 B 오피스텔 개발을 맡은 코람코자산신탁은 2019년 12월로 예정한 입주 일정을 맞추지 못했다. 이에 A 씨는 2020년 4월 분양계약을 해제하고 계약금 반환과 위약금 지급을 요구했다.
그러나 코람코자산신탁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분양계약서에 입주예정일을 ‘2019년 12월’로 제시하긴 했지만 ‘정확한 입주일은 추후 통보 예정’이라고도 명시했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오피스텔 입주 지연은 시공사의 귀책 사유 때문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분양계약서에 특약사항이 기재됐다는 점도 강조했다. 특약 내용은 ‘매도인은 매수인에게 공급 계약상의 책임을 부담하는 경우에도 신탁재산 및 신탁계약의 업무 범위 내에서만 책임을 부담하며 매수인은 등기부로 공시되는 신탁원부의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2심 “설명의무 위반 맞다”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6민사부(재판장 황순현)는 2022년 11월 A 씨의 손을 들어줬다. 특약에 따라 코람코자산신탁의 책임 범위를 제한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됐다. 하지만 법원은 신탁자가 해당 특약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약관법에 따라 사업자는 약관의 ‘중요한 내용’을 고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사회통념에 비춰볼 때 고객이 계약 체결의 여부나 대가를 결정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항을 뜻한다.
재판부는 “원칙적인 책임 범위와 달리 피고의 책임을 신탁재산의 한도 내로 제한해 수분양자의 채권 실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조항”이라며 이 특약이 중요한 내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특약은 ‘신탁재산 및 신탁업무 범위 내에서만 책임을 부담’한다는 추상적인 문구로 기재돼 있을 뿐이어서 그 법적 의미와 이에 따라 장차 감수해야 하는 불이익이 무엇인지 법률에 문외한인 수분양자들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코람코자산신탁이 해당 특약에 관한 설명의무를 이행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제22민사부도 2023년 8월 같은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책임 한정 특약을 공급계약서 일반 조항과 동일한 색깔·크기·글자체로 구분 없이 기재해 중요한 내용임을 외견상 구분하기 어렵다”며 “이 특약은 통상적인 매매계약과는 달리 매도인의 책임을 한정하는 것으로서 수분양자들이 별도의 설명을 듣지 않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에도 피고가 원고에게 존재나 효과를 별도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책임 특약이 업계에서 통용되지만…
대법원도 원심 판단에 잘못이 없다고 봤다. 계약서의 모든 조항에 대해 사업자가 설명 의무를 지는 건 아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거래상 일반적이고 공통된 내용이어서 고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사항이거나 이미 법령에 의해 정해진 것을 되풀이하거나 부연하는 정도는 설명의무가 부과되지 않는다.
대법원은 그러면서 설명의무 면제 여부는 “소송당사자인 특정 고객에 따라 개별적으로 예측 가능성이 있었는지의 측면에서 각각 판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약관법에서) 사업자에게 약관의 명시·설명 의무를 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객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약관의 중요한 사항이 계약 내용으로 적시돼 고객이 예측하지 못한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을 피하는데 근거가 있다”고 판단했다.
책임 한정 특약이 신탁업계에선 통용되고 있는 조항이긴 하다. 대법원은 그러나 “(부동산) 거래 경험이 평생에 몇 번 되지 않고 관리형 토지신탁 등에 관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수분양자 입장에선 별도 설명 없이 예상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한 그간 대법원 판례에 따라 관리형 토지신탁의 수탁자는 신탁사무의 처리상 발행한 채권을 가진 수분양자에 대해 신탁재산은 물론 수탁자의 고유재산으로도 책임을 지는 게 원칙이다.
이런 원칙에 반하는 내용의 특약이라면 더욱더 사업자가 설명 의무를 충실히 해야 했다는 게 대법원 판단이다.
[돋보기]
분양 해제 소송 잇따르는 레지던스…대법 판단은?
최근 생활숙박시설(레지던스)에서도 수분양자와 사업 주체 사이 분양계약 해지 소송이 잇따르고 있다. 최근 하급심 판결을 뒤집고 시행사 측 손을 들어준 대법원 판단이 나와 주목받고 있다.
레지던스는 명칭에서 보듯 엄연히 ‘숙박 용도’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그러나 사실상 주거 목적으로 사용돼 왔고 정부도 이를 방치했다. 한때 ‘아파트 대체재’라 불리며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나 국토교통부가 2021년 레지던스를 주거 목적으로 사용하는 행위에 ‘불법 딱지’를 붙이며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오피스텔로 용도를 변경하거나 숙박시설로 등록하지 않고 레지던스를 주거시설로 사용하는 수요자에 대해 거액의 이행강제금을 물리기로 했다.
레지던스를 주거시설로 사용하기 위해 분양받은 계약자들은 건설사 측에 책임을 돌렸다. 분양 측에서 “주거 용도가 가능하다”고 홍보해 계약했다는 주장이다. 사업 주체는 이를 반박했다. 계약서상 레지던스가 숙박시설이라는 점을 명시했다는 취지다.
분양업체가 홍보나 상담 과정에서 실거주가 가능한 것처럼 설명하고 주거 제한 가능성을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분양자들의 손을 들어준 하급심 판결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1월 대법원 제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레지던스 수분양자들이 분양업체를 상대로 낸 부당이득 반환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분양 홍보물 일부에 ‘주거’, ‘거주’ 등 표현이 있었지만 법적 용도는 숙박시설이라는 내용도 함께 적시된 사실에 주목했다. 대법원은 “(수분양자들이) 건물을 주거 용도로 사용할 수 없음을 인식한 상태에서 계약을 체결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의 상식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이인혁 한국경제 기자 twopeop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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