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걸작 ‘게르니카’ 사이에 둔 스페인 정치 전쟁… 찢어질까 못 옮기나, 뺏길까 안 옮기나
마드리드 “훼손 우려” 對 바스크 “역사적 배상”
세계적인 거장 파블로 피카소가 남긴 반전(反戰) 걸작 ‘게르니카’를 둘러싸고 스페인에서 정치권 갈등이 격해고 있다. 수도 마드리드에 보관 중인 이 대작을 바스크 지역으로 잠시 옮길 수 있느냐는 물리적 대여 논쟁이 발단이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은 오랜 기간 자치권과 독자적인 정체성을 강조해 왔다. 이 과정에서 마드리드 중앙정부와 마찰이 반복됐다.
9일(현지시각) 엘파이스와 엘문도 등 스페인 주요 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지난달 24일 바스크 자치정부는 마드리드에서 열린 문화부 장관 면담에서 게르니카를 2026년 10월 1일부터 2027년 6월 30일까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 전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스페인 정부에 공식 요청했다.

게르니카는 작품 명이자,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 소도시 이름이다. 올해는 1937년 게르니카 폭격 90주기다.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4월 26일, 독재자 프랑코 세력을 지원하던 나치 독일 콘도르 군단과 이탈리아 항공대는 이 지역에 무차별 공습을 가했다. 군사적 목적이 아닌,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였다. 이 폭격으로 발생한 사망자는 자료에 따라 최소 126명에서 최대 1654명으로 추산된다.
피카소는 참상 소식을 접한 직후 폭 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흑백 캔버스에 전쟁 폭력성을 고발하는 걸작을 완성했다. 이후 이 그림은 전 세계를 돌며 전쟁 참혹함과 반전을 외치는 세계적인 상징물로 명성을 얻었다. 피카소는 프랑코 독재 기간 내내 이 작품을 조국 스페인으로 반환하길 거부했다. 이 때문에 게르니카는 오랜 기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걸려 있어야 했다. 스페인에 돌아온 시점은 작품을 완성한 1937년에서 44년이 지난 1981년이었다. 현재 게르니카는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내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바스크 지역민에게 이 작품은 단순히 훌륭한 예술품 그 이상이다. 자신들이 겪은 상처이자, 국가 폭력이 남긴 흉터를 증언하는 시각적 기록물에 가깝다. 올해는 게르니카 폭격 90주기인 동시에 첫 바스크 정부 출범 90주기를 맞는 상징적인 해다. 바스크 정부는 이런 역사적 명분을 들어 이번 전시 요구가 “역사 기억에 대한 제스처이자 상징적 배상”이라고 규정했다. 이보네 벤고에체아 바스크 문화담당 부수반은 “운송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전액 부담하고, 작품 보존에 관한 별도 기술위원회를 꾸리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마드리드 중앙정부와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은 물리적 취약성을 내세워 이동 절대 불가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다. 게르니카는 길이 8미터에 무게 500킬로그램이 넘는 국보급 문화유산이다. 일반 운송 트럭에 실어 보낼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1957년에는 상태 악화를 막고자 캔버스 뒷면에 왁스 수지와 보강재를 덧대는 응급 처치까지 거쳤다. 추가 손상을 막기 위해 부득이 하게 이동할 경우 진동·온도·습도를 정밀 통제한 특수 운송 장비와 대형 전용 포장, 보존 인력이 붙어야 한다. 이런 연유로 게르니카 1981년 뉴욕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온 이후 사실상 움직이지 않았다.
엘파이스에 따르면 미술관 산하 보존복원부는 게르니카 내구성에 관한 16쪽 분량에 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서 복원 전문가들은 “게르니카 그림 표면에 미세한 균열은 물론, 안료층 손상과 그림층 박리 현상까지 광범위하게 발생한 상태”라며 “과거 여러 나라를 돌며 전시를 진행할 때 거대한 캔버스를 말고 펴는 과정이 30차례 넘게 반복되면서 내구성이 한계에 달했다”고 진단했다. 미세한 진동만으로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초취약 상태라는 의미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은 30년 전인 1997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개관할 당시에도 같은 요청을 받았지만, 역시 내구성을 이유로 반려했다. 2000년 MoMA, 2006년 캐나다, 2009년 일본 대여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 한국 역시 2012년 이 그림을 국내로 들여와 전시하려 시도했지만, 훼손 우려 탓에 무산됐다.

겉보기에는 작품 훼손 우려를 내세워 이동을 결사반대하는 중앙정부와 역사적 비극이 서린 현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바스크 자치정부가 정면으로 맞붙은 모양새다. 하지만 사안 내면을 들여다보면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정권 시절 남긴 뼈아픈 상처를 누가 대변하느냐를 두고 벌이는 정치적 주도권 싸움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국가가 자행한 폭력 기억을 마드리드 중앙정부가 계속 통제할 것인지, 피해 당사자인 바스크 지역 사회가 기억 주도권을 되찾을 것인지를 묻는 국가 정체성 문제라고 평했다.
양측 유력 정치인들은 거친 언사를 주고받으며 게르니카 대여 문제를 정치 싸움으로 확전하고 있다. 이사벨 디아스 아유소 마드리드 주정부 수반은 전날 바스크 자치정부에 “모든 것을 원래 출신지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식이면 피카소가 남긴 모든 작품을 고향인 말라가로 보내야 할 것”이라며 “문화는 보편적인데 이런 발상은 매우 지방 중심적(provincial)인 사고방식”이라고 비판했다.
스페인 내 분위기와 전문가 의견을 종합하면 게르니카가 마드리드를 떠나 바스크로 향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술계 전문가들은 보존 논리 자체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스페인 유명 미술사학자 프란시스코 차파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은 사례”라며 반출 불가에 힘을 실었다. 스페인 문화부도 ‘광범위하게 훼손된 상태라는 전문가 의견을 존중한다’며 대여 불가 방침에 쐐기를 박았다. 화가 호세 마누엘 발레스테르는 “과거 스페인 내전 당시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관장으로 임명됐던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하길 진심으로 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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