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일 동안 남미를 하루 평균 10km 걸으면 생기는 일 [여책저책]

장주영 매경 디지털뉴스룸 기자(semiangel@mk.co.kr) 2026. 4. 11. 15:4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려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 가서 800일 넘게 이곳저곳을 누빈 이가 있습니다.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 / 사진 = 언스플래쉬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라는 유행어가 딱 어울리는 말 같습니다. 분명 하루 하루가 힘든 일로 채워질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일테니 말이죠. 하지만 무모한 도전인 듯한 이 여행을 마치고 한 글자 한 글자 또 한 컷 한 컷 골라 엮은 책을 보면 수긍이 갑니다.

여책저책은 노동효 작가의 ‘걸어가자 남미 바람 구두 신은 시인처럼’을 통해 힘듦을 무릅쓰고 여행길에 나선 이유를 만납니다.

걸어가자 남미 바람 구두 신은 시인처럼
노동효 | 나무발전소
사진 = 나무발전소
오래 전 어렸을 때 일이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갑자기 든 궁금증 중 하나, ‘우리나라의 지구 반대편에는 어떤 나라가 있을까’. 이리저리 지도를 돌려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부모님을 졸라 지구본 획득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래도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불로 달군 쇠꼬챙이를 서울 부근에 가져다 댔다. 첫 시도에서는 실패였다. 두 세 번 더 힘을 준 끝에 서울이 뚫렸다. 그렇게 반대편 지구가 있는 곳으로 쭉 밀려갔다. 더 세게 힘을 주자 구멍이 났다. 그렇게 뚫린 곳은 태평양 어느 지점.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방향이 잘못됐다면서 쇠꼬챙이를 재고정해 주셨다. 그럼에도 힘을 줄 때마다 끝점 조정이 어려웠다. 수차례 도전 뒤 다시 뚫린 곳은 남부 브라질이었다. 나름 잘 고정한 듯 보였다. 이후 인터넷이 널리 퍼지기 전까지 막연하게나마 한국의 지구 반대편은 브라질로 여긴 채 살았다. 실제로는 우루과이인데 말이다.

볼리비아 사하마 국립공원 / 사진 = 언스플래쉬
당시에 속으로 다짐한 게 있다. 어른이 되면 꼭 남미여행을 해보겠다고. 둥그런 지구에 대한 환상을 꼭 현실로 이루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마흔을 훌쩍 넘겨 쉰이 코앞인데 코흘리개 시절 목표는 현재진행형이다. 아마도 필자처럼 꿈을 꾼 이들이 적지 않을테다.

이런 꿈같은 도전을 실행으로 옮긴 여행작가가 있다. 이미 ‘남미 히피 로드’라는 책으로 주목받았던 작가 노동효가 약 2년 6개월, 800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남미 곳곳을 누비며 체류한 경험을 또 다시 책으로 옮겼다. 책 ‘걸어가자 남미 바람 구두 신은 시인처럼’이다.

저자는 단순한 ‘이동’이 아닌 ‘머묾’에 가까운 여행 방식, 즉 한 지역에 오래 머물며 현지인의 삶 속으로 스며드는 ‘장기 체류형 여행’을 몸소 실천했다. 저자는 스스로를 여행자가 아닌 ‘방랑자’로 정의하며, 낯선 땅에서도 마치 집처럼 살아가는 시간을 통해 남미의 진짜 얼굴을 포착해낸다.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 사진 = 언스플래쉬
책은 볼리비아 타리히에서 시작해 파타고니아에 이르기까지 남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정을 따라간다. 고산지대 라파스에서는 해발 4000m에서 살아가는 케추아족과 아이마라족의 일상을 통해 인간의 적응력과 생명력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풍경이 만들어낸 시간과 인간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콜롬비아 커피마을에서의 소박한 커피 한 잔, 페루 콜카 협곡을 오르내리며 느낀 지구의 ‘주름’, 파라과이에서 만난 케이팝 팬과의 대화 등이 그렇다.

저자의 여행이 좀 더 놀라운 것은 그가 하루 평균 10㎞ 이상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는 걷는 것 자체를 단순한 이동 수단으로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여겼다. 이러한 모습은 독자에게 여행의 본질이 ‘속도’가 아닌 ‘밀도’에 있음을 알게 한다.

콜롬비아 커피 / 사진 = 언스플래쉬
또한 작품 곳곳에 시적인 문장과 감각적인 묘사가 곁들여지며 보는 재미도 전한다. 안데스 산맥에서 마주한 무지개, 파타고니아의 광활한 자연, 쿠바의 밤하늘을 바라보는 노인의 이야기 등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펼쳐져 독자의 감각을 자극한다. ‘바람 구두 신은 시인처럼’이라는 부제가 단순한 수사가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책의 종착점인 파타고니아에서 저자는 ‘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끝은 단절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다. “세상의 끝에서 어디로 향하든 결국 그것은 새로운 첫걸음”이라는 메시지는 여행을 넘어 삶 전체를 관통하는 통찰로 확장된다.

책은 여행을 단순한 이동이 아닌 ‘존재 방식’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빠르게 소비되는 여행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 속에서 이 책은 느리게 걷고 깊이 머무르며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안한다. 남미라는 공간을 넘어 결국 독자를 자기 삶의 ‘길 위’로 다시 세워놓는 작품이다.

※ ‘여책저책’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세상의 모든 ‘여행 책’을 한데 모아 소개하자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출판사도 좋고, 개별 여행자의 책도 환영합니다. 여행 가이드북부터 여행 에세이나 포토북까지 어느 주제도 상관없습니다. 여행을 주제로 한 책을 알리고 싶다면 ‘여책저책’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