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대물림을 망각해선 안 되는 이유, 《내 이름은》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2026. 4. 11.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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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감독 신작…4·3 사건 정면으로 다룬 노장의 시선 
기억을 복원해 시대를 관통하는 비극의 물줄기 담다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물은 계속 순환하므로 지금 내가 맞고 있는 눈이 1948년 겨울에 내렸던 눈이 아니란 법이 없고,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학살 현장에 내렸던 비가 아니었으리란 법도 없다." 한강 작가,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낭독 中

7년7개월간 전개된 학살이었다. 확인된 희생자만 1만4935명. 추정되는 희생자는 3만 명으로 당시 제주 도민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 4·3 사건 이야기다. 수만 명의 무고한 제주 도민이 공권력에 학살당했지만, 공산당 토벌이란 명분 아래 미군정은 학살을 묵인했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진실을 외면했다. 4·3에 연루돼 억울하게 감옥을 다녀온 이들도 상당했다. 감옥을 갔다 왔다는 사실 자체가 인생에 빨간 줄을 긋는 것이었기에, 다녀온 이들도 그들의 자녀들도 진실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렇게 4·3은 세월에 묻혀 잊혔다. 규모에 비해, 비극적 사건이 세상에 덜 알려진 이유다.

금기어였던 4·3이 다시 밖으로 나오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한 것은 예술이다. 김석범의 장편소설 《화산도》, 현기영의 단편소설 《순이삼촌》,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이 문학의 언어로 4·3 사건을 어루만졌다. 제29회 선댄스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오멸의 《지슬》은 위령제 형식으로 4·3 영혼을 위로했고, 김경만 감독의 다큐멘터리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억울하게 옥살이한 할머니 5명의 목소리를 빌려 그날을 증언했다. 노벨상 수상자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빼놓을 수 없다. 아마도, 4·3을 외부 세계에 가장 넓고 깊게 알린 작품일 것이다. 그리고 기억을 복원해 내려는 또 한 편의 창작물이 나왔다. 정지영 감독의 《내 이름은》이다.

영화 《내 이름은》 포스터 ⓒCJ CGV, 와이드 릴리즈㈜

교차하는 폭력으로 진실에 다가가

소재가 주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굳이 돌아가거나, 스스로 작아진 영화들이 있다.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5·18을 다룬 《화려한 휴가》가 그랬고 《26년》이 그랬다. 만듦새가 투박하긴 하나, 《내 이름은》에 사건이 주는 부담에 눌린 자국은 없다. 이는 정지영 감독 특유의 기세와 무관하지 않을 텐데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남영동 1985》(2012) 등에서 한국 현대사를 정면에서 다뤄온 노장 감독의 작품답다.

1998년(4·3 사건에 대한 언급이 금기에서 풀린 해) 제주. 정순(염혜란 분)은 망각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녀에겐 9세 이전의 기억이 없다. 다만 바람에 흩날리는 풀잎만 보면 이유 모를 발작이 일어나는 신체 반응에서 과거의 숨은 그림자를 엿볼 뿐이다. 만성이 된 병을 방치하던 정순은 새로 부임한 정신과 의사(김규리 분)의 도움을 받아 과거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과, 어디론가 달리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아이는 도대체 누구일까.

그런 정순 곁에는 고등학생 아들 영옥(신우빈 분)이 있다. 여자 같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툴툴대긴 하지만, 누구보다 착한 아들이다. 학교에서도 모범생으로 통한다. 그런 영옥의 삶이 서울에서(외부 세계에서) 전학 온 경태(박지빈 분)로 인해 깨진다. 폭력을 내세워 힘으로 강압하는 경태로 인해 교실은 살얼음판으로 변하고, 영옥은 그런 경태에게 순응하느라 단짝 친구 민수(최준우 분)와 데면데면해진다.

《내 이름은》은 정순의 기억에서 지워진 4·3이라는 '국가폭력'과 영옥이 겪는 1990년대 '학교폭력'을 교차하며 그날의 진실에 다가간다. "끔찍한 국가폭력을 느닷없이 보여주면 관객들이 충격을 받을 수 있기에 1998년 교실에서 자행되는 학교폭력을 일종의 완충 지대로 삼아 과거와 현재를 교차했다"는 게 정지영 감독의 변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낯선 곳에서 침투한 외부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이라는 점에서도 정순과 영옥의 사연은 맞닿아 있다.

더 나아가 《내 이름은》은 정순의 (죽은) 딸과 남편을 통해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베트남 전쟁도 언급한다. 국가폭력은 어떻게 한 가정을 난도질하는가. 폭력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한강 작가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중요하게 다룬 '물의 순환'이 연상되는 건 이 때문이다. 명명하자면, 폭력의 대물림이다. 정순에게 쏟아진 비극이 순환하며 시대를 관통해 이어진다. 다만, 4·3 외 다른 역사적 사건들까지 품으면서 이야기가 다소 느슨해진 면은 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그것이 외연의 확장으로 보일 수도 있기에 해석이 갈릴 것으로 보인다.

제목이 암시하듯 개인의 '이름 찾기'를 통해 시대의 비극을 비추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그러나 독창적인 영화라고 할 수는 없는데, 이는 오멸의 《지슬》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해진다. 《지슬》이 전에 없는 문법으로 4·3을 다뤘었다면, 《내 이름은》은 어떻게 보면 촌스러울 만큼 우직한 정공법으로 4·3을 이야기한다. 뚝뚝 끊기는 장면 전환에서 기술적 한계가 드러나고, 메시지 전달 방식 역시 세련되지는 못하다.

이러한 단점을 메우는 건, 영화 완성에 힘을 보탠 9778명의 시민이다. '진심'이라는 단어가 오염된 시대지만, 잊힌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 제작비 4억원을 후원한 시민들 마음을 진심이 아니라 하기는 어렵다. 엔딩 크레딧에 5분여간 이어지는 후원자의 이름은 《내 이름은》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이름들이다.

영화 《내 이름은》 스틸컷 ⓒCJ CGV, 와이드 릴리즈㈜
영화 《내 이름은》 스틸컷 ⓒCJ CGV, 와이드 릴리즈㈜
영화 《내 이름은》 스틸컷 ⓒCJ CGV, 와이드 릴리즈㈜

완결형이 아닌 현재진행형 사건

그리고 염혜란이다. 지난해 호평받은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염혜란은 비극을 견뎌내는 강인한 제주의 어머니 광례를 연기한 바 있는데, 광례에게서 정순에게로 바통 터치하듯 이어지는 기운이 영화에 색다른 감흥을 전한다. 장면을 훔치는 연기란 무엇인가를 매 작품에서 증명해 보이고 있는 염혜란의 연기가 《내 이름은》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는다.

4·3 사건은 완결형의 비극이 아니다. 현재진행형인 사건이다. 여전히 일부 보수우익 단체는 4·3을 왜곡, 폄훼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4·3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다는 점에서도 진실을 건져 올리는 일은 중요하다. 4·3만의 문제도 아니다. 청산되지 않은 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참사를 겪은 이들이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할 때마다 '빨갱이'라며 왜곡하고 폄훼하는 말이 잇따라 나오는데, 왜 그럴까 의문을 품으며 거슬러 올라가 보니 4·3에 이르게 되더라." 《돌들이 말할 때까지》를 만든 김경만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언급한 말이다. 비극의 역사를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우린 잊힌 그 이름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이름은》에 지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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