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죽고 싶은 한국 사람들의 공통점은? [안락사에 관한 ‘사회적 대화’ ④]

폐섬유증을 앓는 60대 남성이 스위스행 비행기에 탔다가 이륙 직전 출국을 포기한 일이 지난 2월 보도되었다. 가족은 그가 이른바 ‘안락사’를 목적으로 해외로 가려 한다고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유서 형식의 편지가 발견되자 경찰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가족의 우려를 전하며 만류에 나섰다.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경찰관이 중심이 되어 대화를 이어갔다. 그 남성은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결국 탑승을 포기하고 가족에게 인계되었다.
이 뉴스는 큰 주목을 받았다. 여러 언론사가 보도했고, 많은 댓글이 달렸다. 무엇보다 자신이 바라는 죽음을 향해 스위스로 떠나려는 사람과 이를 막으려는 가족, 그리고 그를 다시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늠름한 경찰의 모습이 공항이라는 공간 안에 포개지며 극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죽음을 둘러싼 작금의 현실이 얼마나 비참한지에 대한 문제의식도 자리하고 있다. 생의 끝자락에서 의료와 돌봄 체계를 믿고 의지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널리 공유되고 있기에, 이 일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로 읽히지 않았다.
한편 이 보도는 ‘스위스행’이라는 개인의 선택을 조명하지만, 정작 그 60대 남성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었는지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기사에는 그가 폐섬유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만 제시될 뿐, 그 질환이 그의 몸과 일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게다가 가족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사회적 활동에는 어떤 제약이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마무리를 바라고 있었는지에 관한 정보와 질문도 비어 있다. 이 뉴스에 달린 댓글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이 자신의 의사로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겠다는데 왜 가족과 경찰이 이를 막느냐.” “쓸데없는 입원이나 연명치료에 왜 개인과 국가의 돈을 낭비하나.” “다 늙어 대소변도 가리지 못한 채 남에게 의지하며 생을 연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보도와 반응은 오늘날 안락사를 규정짓는 하나의 틀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 틀 안에서 죽음을 둘러싼 불안은 더욱 증폭된다. 그렇게 형성된 서사는 향후 보도와 댓글, 나아가 일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과정을 통해 안락사는 한 개인의 절박한 선택과 외부의 부당한 간섭이 충돌하는 문제로 압축된다. 이 대립 구도를 일컬어 ‘개인의 자유 대 사회의 억압’ 혹은 ‘자기결정권 대 생명의 신성함’으로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안락사는 ‘내 죽음을 방해하는 요인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는 선택’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그러한 안락사는 현실에서 존재하기 어렵다.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애초에 사회적 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법학자 김현철은 자율성은 중요한 가치임에 틀림없지만, 오로지 자율성 하나로 규범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자율성은 공동체의 승인(recognition)이 필요하며 타인의 자율성과 공존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인정되는 측면도 있다. 가령 미성년자가 선택의 자유나 자기결정권을 주장한다고 해서 편의점에서 술을 살 수는 없고, 기차 안에서 승객이 자신의 선택이나 결정을 내세워 음악 볼륨을 크게 트는 행위 역시 제한된다. 요컨대 안락사를 둘러싼 논의에서 주목할 것은 한국 사회가 죽음을 문제화하는 방식이다. 죽음은 왜 개인이 결정해야 하는(결정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되었을까. ‘우리가 상상하는 안락사’와 실제 해외 안락사 제도의 차이를 통해, 한국 사회가 앞으로 다뤄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우선, 안락사를 ‘내 마음대로 죽을 자유’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원하는 시간과 장소, 방법을 스스로 정해 죽음에 이르는 행위는 자살로 볼 수 있다. 이미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특별히 국가가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고 실행할 자유’를 보장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안락사는 자살과 다르다. 개념을 상기하면, 안락사는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 환자의 고통을 덜기 위해, 본인의 요청에 따라 의료적 조력을 통해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기는 행위’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안락사를 요청하는 주체는 고통을 겪는 개인이지만, 그 요청에 응답하는 주체는 의사라는 것이다. 이는 현재 안락사(의사조력자살 포함)를 합법화한 모든 사회의 공통점이다.
그 사회에서 의사는 안락사 요청자의 고통을 확인하고, 다른 치료와 돌봄의 가능성을 검토하며, 여러 전문가와 협력하고, 사회 자원을 연계하는 역할을 맡는다. 즉, 의사는 공동체를 대표해 요청자의 고통을 덜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그에 응답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 개입의 범위와 강도, 절차와 규범은 사회마다 다르다. 가령 같은 북미 지역이라도 미국에서는 의사의 역할이 주로 처방과 요건 확인에 머무르는 반면, 캐나다에서는 의사가 요청자에 대한 평가와 연계 과정에 폭넓게 관여한다. 또한 미국에서는 일부 주에서 의사조력자살만 허용하는 반면, 캐나다에서는 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이 모두 허용된다. 이러한 차이가 있지만, 두 사회 모두 의사가 요청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주체라는 점은 같다.
안락사 요청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주체가 왜 하필 의사인가. 의사에 대한 신뢰가 그리 높지 않은 한국에서 제기될 법한 질문(혹은 불만)이다. 그 물음에 간단히 대답하면 이렇다. 오늘날 공론장에서 논의되는 안락사에는 분명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 이 안락사는 의료 기술의 발달로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 환자의 고통이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몇몇 서구 사회에서 나타난 새로운 죽음의 방식을 가리킨다. 소위 ‘현대사회’에서 고통은 각종 증상과 진단명으로 분류되며, 의료의 개입이 필요한 영역으로 편입되어왔다. 그 고통을 가장 가까이에서 파악하고 치료의 가능성과 한계를 판단하며 환자의 아픔을 덜기 위해 개입해온 직군이 바로 의사다. 안락사 논의에서 의사가 중요한 주체로 놓이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고통에 응답하는 주체로서의 의사
물론 안락사 제도는 죽음을 의료의 언어와 권한 속으로 과도하게 포섭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이 곧바로 안락사 반대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안락사는 요청자의 고통이 무엇인지 의사를 비롯한 공동체가 살피고, 그 고통을 덜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제도로 볼 수도 있다. 더욱이 안락사는 최첨단 의료 기술로도 해결되지 않는 고통을 다룬다는 점에서, 고통이 의료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제도라고 할 수도 있다. 그 고통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돌봄의 계획과 실천이 등장할 수 있고, 그 과정을 통해 고통이 완화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고통을 덜기 어렵다고 의사가 판단한다면, 요청자의 죽음을 인위적으로 앞당기는 것이 바로 안락사다. 특히 네덜란드와 캐나다의 안락사 제도는 참고할 만한 점이 있다.
네덜란드에서 현장 연구를 수행한 인류학자 프랜시스 노우드는 안락사가 하나의 ‘대화’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곳에서 안락사는 가정의(huisarts)를 중심으로 환자 및 가족이 함께 대화하는 과정에 가깝다. 평소 가정의는 진료실과 왕진을 오가며 환자의 상태뿐 아니라 가족의 상황과 돌봄 환경까지 오랜 시간 살피고, 필요할 경우 가정간호사나 요양보호사와도 긴밀히 협력한다. 따라서 안락사 논의 역시 한 번의 요청과 승인으로 끝나지 않고, 환자의 고통과 예후, 가족의 지지 여부, 다른 돌봄의 가능성을 여러 차례 조율하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락사 자체보다 이를 계기로 환자와 가족, 의사 사이에서 말기 돌봄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조정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고령의 환자나 암 환자, 혹은 전신마비 환자가 가정의에게 안락사를 요청할 수 있다. 이때 가정의는 그 요청을, 환자와 함께 다양한 돌봄 방안을 논의하는 출발점으로 삼는다. 법이 보장하는 안락사라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 외에도 환자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환자 그리고 가족과 소통한다. 여기에는 완화의료, 물리치료, 심리상담, 간병 지원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의사는 이러한 대화가 환자를 사회적 행위자로서 지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환자의 고통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의사는 법이 정한 주의 요건을 충족한 뒤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는 의사의 책임감이 고도로 발휘되는 행위이다. 환자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의사조력자살보다는 대체로 의사가 직접 약물을 투여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대부분의 환자는 의사가 직접 약물을 투입하는 안락사를 선택한다.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는 가정의에 의해 환자 집에서 이뤄지며, 국민건강보험의 적용도 받는다. 이는 안락사가 개인의 결단에만 맡겨진 문제가 아니라, 의사를 비롯한 공동체가 요청자의 고통에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응답하는 제도임을 보여준다. 요컨대 안락사의 정당성은 ‘자살’이 아니라 ‘응답’에 있다. 이 응답은 사회적 조력이나 연대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캐나다의 안락사 제도인 ‘의료조력사망(MAID, Medical Assistance in Dying)’ 역시 안락사를 개인의 고독한 결단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공동체의 응답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 제도는 공적 의료체계 안에서 운영되며, 신청자는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의료서비스의 수급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핵심 자격 기준 가운데 하나는 신청자가 ‘극심하고 회복 불가능한 의학적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캐나다의 공식 지침에 따르면, ‘회복 불가능함’이란 더 이상 합리적인 수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이 판단은 의사와 환자가 전반적 건강 상태, 신념, 가치, 돌봄의 목표를 함께 고려하며, 이용 가능하고 효과적인 치료와 개입을 충분히 검토한 뒤에 이루어진다. 이는 의사를 비롯한 공동체가 신청자의 고통을 단순한 병명이나 증상으로 환원하지 않고, 신체적·사회적·직업적 삶의 차원까지 함께 살핀다는 뜻이다.
캐나다의 안락사 제도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구조적인 취약성(structural vulnerability)’에 대한 고려이다. 정부 지침에 따르면 의사는 신청자가 이러한 취약성에 놓여 있는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구조적 취약성이란 개인의 선택 이전에 사회와 제도 속에 이미 스며든 편향과 장벽을 뜻한다. 이로 인해 어떤 이들은 적절한 의료와 자원에 충분히 접근하지 못한 채 고통을 겪게 된다. 캐나다 정부는 장애인이나 원주민 등이 의료체계 안팎에서 오랫동안 차별과 배제를 경험해왔다는 점을 그 사례로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의사를 비롯한 실무자는 신청자 삶의 조건이 안락사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의사 개인이 모두 해소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의사가 신청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편견과 차별이 개입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데 있다. 또한 고통을 덜기 위해 이용 가능한 선택지를 충분히 알리고, 신청자가 실제로 그 방법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일 역시 중요하다. 이런 흐름에서 의사는 간호사, 사회복지사, 심리상담사 등 다양한 전문 인력과 협력하게 된다. 나아가 상황에 따라 장애인 지원, 주거 지원, 정신건강 서비스, 지역 돌봄과 같은 사회적 자원을 연계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된다. 이처럼 캐나다의 안락사 제도는 고통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사를 비롯한 공동체가 함께 응답해야 할 문제로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혹자는 네덜란드와 캐나다의 제도를 접하며,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의 규범이 앞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오히려 안락사 선택이 더 제한될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다. 그러나 공식 통계는 이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네덜란드에서는 2024년 전체 사망자의 약 5%가 안락사였고, 캐나다에서도 같은 해 그 비율이 약 5%에 이르렀다. 이는 안락사(의사조력자살 포함)를 합법화한 사회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한다. 더욱이 네덜란드와 캐나다는 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을 모두 허용하며, 말기 환자뿐 아니라 비말기 환자의 고통도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반면 개인의 자유와 선택권을 강하게 내세우는 미국에서는 상황이 다르게 나타난다. 오리건주의 경우 말기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의사조력사망만을 허용하며, 그 비율이 연평균 전체 사망의 1% 정도에 머문다. 다른 주들도 대체로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스위스에서는 민간단체를 통해 의사조력자살이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신청자는 비용은 물론이고 정보 습득과 소통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2023년 기준 스위스 전체 사망자 대비 그 비율은 약 2% 수준에 머물렀다.
요컨대 네덜란드와 캐나다의 안락사 제도는 공동체적 조력이 극심한 고통을 덜기 위한 개인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조건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공동체적 조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치료 방법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의 상태를 단순히 의학적 진단과 처치의 문제로만 보지 않겠다는 태도다. 대신 당사자의 목소리와 삶의 역사 속에서 그 고통을 살펴보고, 이를 덜기 위한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과정이다. 또한 도움을 요청하는 개인이 놓인 구조적 취약성과 불평등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실천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의사는 환자와 장기간에 걸쳐 소통적 관계를 맺으며 신뢰를 축적하고, 그러한 판단과 결정을 뒷받침하는 법적·제도적 기반 역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죽음의 지형도’를 정밀하게 그리는 법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안락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네덜란드나 캐나다에 있었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실제로 안락사에 이르렀을까. 아니, 그 사회에서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얼마나 다양하고 실질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 내가 만난, 스위스행을 바라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척수손상으로 전신마비를 겪는 환자, 고령 환자, 말기암 환자, 그리고 간병을 도맡은 가족.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사회적 고립’이었다. 간병의 부담, 경제적 어려움, 시설 내 비인간적인 대우, 그리고 사회자원 연계의 부재. 이러한 조건들은 그들의 고통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었다.

한국에서 안락사에 관한 논의는 죽음 앞에 놓인 개인의 고통만이 아니라 그 경험을 구성하는 구조적 규정까지 함께 생각하게 한다.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가 지적한 제도화된 사회질서로서의 자본주의는 경제적 생산 인구(돈 버는 사람)와 이를 떠받치는 사회적 재생산 인구(돌보는 사람)를 철저히 위계적으로 분리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그 분리 바깥에 생산도 재생산도 하지 못하는, 쓸모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제3의 인구’가 있다는 의심을 거두기 힘들다.
이런 맥락에서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 사람의 고통은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이른바 의존적 노인, 중증장애인, 말기암 환자 등일 것이다. 가령 이들이 생산과 재생산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혹은 스스로를 ‘무의미한 존재’로 여기며 고립되거나 시설로 가야 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차별과 배제의 경험이다. 더욱이 단지 의료 처치의 대상으로만 다뤄지거나 자신의 삶의 역사와 목소리를 표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사회적 죽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안락사는 자기결정권이나 생명의 신성함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살 만하지 않은 삶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한 저항의 형태로 상상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안락사가 왜 ‘내 죽음을 방해하는 요인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는 선택’으로 호출되는지 조명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죽음이 왜 개인이 결정해야 하는, 혹은 결정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되었는지도 함께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안락사에 관한 사회적 대화는 결국 안락사를 매개로 한 사회적 성찰로 이어진다. 이와 관련해 한국 사회가 앞으로 다뤄야 할 과제는 적지 않다. 그중 한 가지를 민주공화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에게 제안하고자 한다. 우리가 바라는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숙의하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일 년 이상, 전국의 다양한 단위에서 시민들이 참여하는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정부는 이러한 논의가 가능하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시민들이 자부심을 갖고 숙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실질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2023년 프랑스 시민 의회는 안락사 문제를 둘러싸고 시민들이 장기간 숙의에 참여한 사례로 참고할 만하다. 요컨대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한다.
이 숙의 과정에서 시민들은 죽음을 둘러싼 고통과 불안이 무엇인지 서로 공유하고, 그 경험을 형성하는 구조적 문제 또한 함께 살펴야 한다. 더불어 우리가 바라는 의료와 돌봄의 모습에 대해서도 차분히 논의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모아 ‘죽음의 지형도’를 정밀하게 그려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정확히 파악할 때에야, 어디로 나아갈지 판단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안락사를 수용할지 여부 역시 이러한 숙의 과정 속에서 점차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참고 문헌
〈죽음 문화의 다지형성과 삶의 마무리에 대한 규범〉 (김현철, 2011, 생명윤리정책연구)
〈포식하는 자본주의〉 (낸시 프레이저 외, 장석준 옮김, 2025, 프시케의숲)
〈The Maintenance of Life〉 (Frances Norwood, 2020, Carolina Academic Press)
송병기 (의료인류학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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