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나비 너도 레몬 나무가 좋니? [임보 일기]
날이 좀 따듯해졌다고 텅 비어 있던 화분의 흙 위에 작은 연둣빛 점들이 늘어간다. 메말랐던 가지에는 물론이고 이미 잘 자라고 있던 식물에도 새잎이 하나둘 돋아나고 있다. 봄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식물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해진 요즘이다.
초봄에는 식물이 추위를 못 이기고 혹여나 죽었을까 걱정하는 마음을 한가득 안고 메마른 가지를 더욱 유심히 보게 된다. 겨우내 고사했는지 추위를 견뎌냈는지,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다. 그저 시간을 갖고 기다릴밖에. 어서 햇볕 가득 쬐고 아직 살아 있다고, 새잎을 내며 말해주길 바란다.
생사가 긴가민가한 식물도 있지만 한편으론 당연히 죽은 걸로만 보이는 식물도 종종 있다. 몇 해 전 겨울, 선물받은 씨앗이 잎이 무성한 작은 나무가 될 때까지 키워냈던 타마린드가 그랬다. 생소한 이름의 타마린드는 아까시나무와 비슷한 잎사귀를 가진 열대식물로 열매의 맛이 참 좋다고 한다. 단단한 씨앗에서 정말 싹이 날까 의심도 잠시, 금세 무럭무럭 잎을 무성하게 뽐냈고 여렸던 초록 가지도 갈색빛으로 목질화가 되었다. 잠시나마 언젠가 커다란 나무가 될 모습을 상상하며 설렜다.
그러던 어느 날, 날씨가 조금 추워지자 그 많은 잎을 하염없이 우수수 떨구는 게 아닌가. 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열대식물을 추운 집에서 키운 것이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씨앗을 나눠 가졌던 친구들도 모두 타마린드가 죽은 것 같다고 소식을 전해왔는데···. 몇 달 뒤, 한 친구가 타마린드가 봄이 되니 다시 싹을 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우수수 잎을 떨군 뒤 죽은 듯이 동면하고 있었던 거다. 앙상한 가지만 보는 게 속상해 부지런히 바로 화분을 비워낸 게 얼마나 후회스럽던지. 더 긴 호흡으로 식물을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험으로 지금은 열대식물을 집에 잘 들이지 않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키우기 시작한 첫 식물 중 하나는 한국의 겨울을 야외에서 버티지 못하는 레몬 나무다. 레몬을 먹고 나온 씨앗을 별생각 없이 흙에 심었다가 혼자 잘 발아해서 쑥쑥 자라길래 얼떨결에 키우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레몬 나무는 키운 지 약 5년 차로 지금은 키가 거의 2m다. 추운 겨울엔 집에 들여두고 더운 여름에는 마당에 두는데, 우리 집 마당 곤충 손님 중에 특히 호랑나비가 레몬 나무를 매우 좋아하는 단골이다. 향긋한 레몬 잎사귀가 마음에 들었는지 매년 날아와 잎사귀 귀퉁이에 알을 낳고 간다.
잘 성장한 레몬 나무의 잎사귀를 호랑나비의 애벌레가 갉아 먹는 것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애벌레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매년 작게 자란 여린 레몬 나무 묘목을 한 화분에 모아 호랑나비 애벌레의 전용 식사 공간으로 가꾸어주었다. 벌레를 죽이지 않고 공생하는 삶을 지향하다니! 내심 스스로 잘하고 있다며 대견스러워했다.
애벌레가 호랑나비로 변하는 데 양분이 되어준 레몬 나무 묘목의 잎은 쌀 한 톨만큼도 살아남지 못했고, 줄기만 앙상하게 남은 것을 나는 그대로 방치했다. 며칠 전, 집 안의 화분에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로 알로카시아 옆에 심겨 있던 레몬 나무에서 새싹이 돋은 것을 보았다. 겨울이라고 알로카시아 화분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을 뿐인데 줄기만 남아 있던 레몬 나무가 새 잎사귀를 낸 것이다. 당연히 죽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 돌아보니 애벌레를 죽이고 싶지 않은 나의 입장만 생각했을 뿐, 애벌레에게 잎을 잃은 레몬 나무의 처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 몇 년간 레몬 나무를 애벌레의 밥으로만 취급한 내가 참 한심하고 오만했다. 하나는 알았는데 둘을 알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다.
올해에도 애벌레 식사 화분을 만들겠지만, 이전과는 달리 애벌레와 레몬 나무의 균형을 잘 맞춰줄 수 있도록 해봐야겠다. 죽은 듯 앙상한 레몬 나무도 때가 오니 다시 잎사귀를 낸다는 것을 이제 배웠으니까. 늘 마음부터 바쁘고 급한 내게 작은 레몬 나무 잎사귀가 알려준 거다. 때로는 긴 호흡도, 기다림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백수혜 (‘공덕동 식물유치원’ 원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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