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는 경험이다, 독서의 진화 [.txt]

전세계의 이목이 쏠렸던 방탄소년단(BTS) 공연이 열린 지난달 21일. 외국인과 내국인들이 속속 서울 광화문으로 모여들던 오후 2시, 광화문에서 멀지 않은 서소문역사공원에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간혹 친구와 함께 오기도 했지만 대부분 혼자였던 이들은 조용히 돗자리를 펼치고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캠핑용 의자와 테이블을 펼치고 책을 읽는 이들, 커피를 마시며 읽는 이들, 이어폰을 끼고 읽는 이들…. 순식간에 100여명으로 불어난 이들의 모습은 공원 잔디밭을 거대한 야외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1시간쯤 지났을까, 꼿꼿하던 자세들에 여유가 생겼다. 돗자리에서 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 엎드린 채 페이지를 넘기는 사람들 덕분에 그곳은 평화롭고 느긋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함께 모여 독서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뿜어내는 에너지 덕분일까. 책 한권을 들고 독서클럽에 참여한 기자 역시 평소와 다른 몰입감을 느꼈다. 그뿐만 아니라 바람의 촉감, 햇빛의 온기,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까지 더해지며, 독서는 단순한 시각 활동을 넘어 공감각적 경험으로 확장됐다.
약속한 두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조용히 떠났다. 통성명도, 대화도 없었다. 공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의 잔디밭으로 돌아갔다.
이날 행사의 제목은 ‘침묵독서클럽’. 1인 출판사 ‘소서사’를 운영하는 김지은 대표가 매달 한번씩 여는 행사다. 그는 “편집자로 일할 때 독자를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모임을 시도하던 중 미국에서 ‘사일런트 북클럽’이 유행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뒤 시작하게 됐다”며 “북토크나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겸하는 독서 행사가 많은 요즘, 그냥 책만 읽는 행사 하나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모임은 지난해 8월 선유도공원에서 처음 시작됐다. 당시 김 대표가 에스엔에스에 ‘함께 책을 읽자’고 올린 제안에 100명이 몰렸다. “30명만 와도 다행이겠다 싶었는데 100명이 와서 너무 놀랐어요. 무더운 날씨에도 땀을 흘리며 책을 읽은 뒤 ‘즐겁게 읽고 간다’며 인사를 건네주시는데 너무 큰 감동이었죠.”

이후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청계천변, 서울식물원, 디뮤지엄, 종각역 태양의 정원 등 서울의 다양한 장소에서 책을 읽었다. 공지와 신청은 인스타그램 ‘침묵독서클럽’ 계정을 통해 이뤄지며, 공간 규모에 따라 참가 인원을 제한하기도 한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지난달 행사는 하루도 채 되기 전에 신청이 마감됐다. 참가비는 없다. “독서는 책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게 김 대표의 소신이기 때문이다.
대화도 하지 않는데 편하게 집에서 혼자 책을 보면 될 텐데, 이들은 굳이 함께 모일까? 모임을 통해 이들이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집중의 순간과 느슨한 연결감’이다. 김 대표는 “읽기에 집중하는 것과 이렇게 집중해서 읽는 사람이 있다는 걸 서로 목격하는 것이 목표”라며 “원래 조금은 고립된 느낌을 주는 활동이었던 독서가, 함께 읽는 순간, 책을 읽는 사람들끼리 묶여 있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준다는 감각까지 얻어 가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날 참여한 서은서씨는 “함께 책을 읽는다는 이유만으로도 묘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면서도 서로의 정보를 전혀 모르고 모이고 헤어지는 자유로움이 좋았다”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장소, 시간, 책을 온전히 탐닉하고 만끽할 수 있어 무척 즐거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독서는 이처럼 ‘함께 경험하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확장되고 있다.
개그맨 출신 베스트셀러 작가 고명환씨도 지난해 11월 200여명의 독자들과 함께 ‘제1회 고명환의 독서열차’를 진행했다. 그는 유튜브 ‘고명환티브이(tv)’에서 ‘11월4일 낮 12시50분 용산역~춘천역 ITX-청춘 열차를 함께 예매해 독서를 하면서 춘천 여행을 다녀오자’는 제안을 했다. 이에 240명이 순식간에 예매를 했다. 이들은 춘천행 기차 안에서 책을 읽은 뒤 춘천에서 내려 닭갈비를 먹고 산책을 하고 야외 공연장에서 강연과 토론 시간을 가졌다. 돌아오는 기차에서도 독서는 이어졌다. 별도의 참가비는 없었고, 식사 비용만 각자 부담했다.
고 작가는 “독서가 숙제나 의무가 아니라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느끼게 하기 위해 행사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제가 기차에서 책 읽는 것을 워낙 좋아했거든요. 우리가 즐거운 기억이 있으면 더 하려고 하고, 어떤 걸 습관으로 만들려면 매력적인 것과 묶으면 더 좋다고 하잖아요. 책 한권 읽으면서 당일치기 기차여행을 다녀오는 건 생각만으로도 낭만적이죠. 실제로 해보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평일 낮이라서 30명만 와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240명이 와서 깜짝 놀랐어요.”
그 역시 이 활동이 외부에 보여짐으로써 얻어질 긍정적 효과에 기대를 걸고 있다.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춘천 시내를 걸어 다니니까 사람들이 대체 이게 무슨 모임이냐고 많이들 물어보더라고요. 독서 모임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것에 다들 엄청나게 놀라워했어요.” 올해는 춘천뿐 아니라 여수 등 더 먼 지역으로 독서열차를 확대할 계획이다.

등산과 독서를 결합한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예스24가 지난달 시작한 야외 독서 프로젝트 ‘산책 山冊, 산에서 책 이야기’는 지역 작가·출판사·독자가 함께 산을 오르며 책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다. 독서 방식을 확장하고 지역 출판 생태계를 연결하기 위해 기획된 캠페인형 프로젝트다.
지난달 22일 부산 황령산에서 진행한 행사에서는 부산에서 활동하는 오성은 소설가, 호밀밭 출판사 정진리 편집자가 독자들과 함께 산을 오른 뒤 동네서점 ‘크레타’를 방문했다. 정상에서는 각자가 준비한 책을 서로 선물하면서 손 편지를 읽는 시간도 마련됐다. 손민규 예스24 피디는 “지난해에 서울 불암산에서 한번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독자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서 지역의 동네 책방들도 소개할 겸 여러 도시들을 돌면 좋겠다 싶어 올해 시작하게 됐다”며 “참여자들이 ‘디지털 디톡스’가 확실히 되는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추천하는 여러 책을 알게 돼 기뻤다, 저마다의 책에 대한 고민과 애정을 알게 되는 좋은 시간이었다는 후기를 남겨줘 보람을 느꼈다”고 전했다.
프로그램은 4월 대구, 5월 대전으로 이어진다. 대구 편은 이달 19일 대구 앞산 안지랑골 체육공원에서 출발해 비파산 전망대와 정상까지 오르는 코스로 진행된다. 이번 행사에는 대구 지역 서점 ‘물루’, 출판사 ‘임시보관소’를 운영하는 송재은 작가, 한티재 출판사의 오은지 대표 등이 참여해 독자들과 소통할 예정이다. 참가 신청은 예스24 누리집(홈페이지) 안 ‘클래스24’를 통해 오는 17일까지 받는다. 손민규 피디는 “앞으로는 광역시를 넘어 소도시 등 전국으로 무대를 넓히고, 산과 바닷가, 둘레길 등 다양한 자연 공간으로 행사를 확장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외에 아침 일찍 커피숍에서 만나서 커피를 마시며 책 얘기를 나누는 모임도 있다. ‘서울모닝커피클럽 북다이브’는 이른 아침 카페에 모여 책을 읽고 하루를 시작하는 독서 커뮤니티다. 출근 전 시간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기존 독서 모임과 차별화된다. 참가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카페에 모여 각자 가져온 책을 읽고,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일상으로 흩어진다. 지난달에는 매주 수요일 아침 7~9시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 내 대형 카페에서 진행됐다.
북다이브의 특징은 ‘부담 없음’이다. 지정 도서도, 긴 토론도, 고정 멤버십도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해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하루를 활기 있게 시작하는 데 초점을 둔다. 참여자들은 ‘퇴근 후보다 아침에 독서 집중력이 좋다’ ‘독서로 하루를 시작하면 삶의 리듬이 달라진다’ 등의 평가를 남기며 높은 만족도를 드러낸다. 참가비는 커피값 정도만 내면 된다. 인스타그램 ‘서울모닝커피클럽’을 통해 공지 및 신청이 이뤄진다.
다양한 방식의 독서 모임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강한 규칙이나 의무가 없고, 비용 부담도 적으며, 책을 매개로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는 감각’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독서가 혼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공원·기차·산·카페라는 다양한 공간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에 대해 ‘경험수집가의 시대’(청림출판)를 쓴 송수진 고려대 글로벌비즈니스대학 교수는 “책을 매개로 혹은 장소를 매개로 해서 함께 만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한 취향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요즘 세대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이 역시 새로운 경험과 관계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시키는 여정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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