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감독 배틀'에서 완패했던 장항준...그가 결국 웃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신이 잘 알지 못 했던 장항준 감독<2>
장항준 감독은 ‘불어라 봄바람’(2003) 이후 긴 겨울잠에 들어간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 출전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다룬 ‘꿈의 시작’도, 채무자를 잡으러 갔다가 첩보전에 휘말리는 이의 사연을 그린 ‘메이드 인 홍콩’도 시나리오 상태에서 더이상 진전이 없었다.
2008년 장 감독은 안방극장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케이블TV 영화전문채널 OCN에서였다. 한국 영화가 각광을 받자 OCN은 영화 채널답게 독특한 기획을 했다. 영화감독 두 명에게 영화 두 작품씩 연출을 의뢰해 대결을 펼치도록 한 것이다. 한 작품은 TV 방영뿐 아니라 극장에서 개봉까지 해 관객 수로 우위를 따지고, 또 다른 한 작품은 TV 시청률로 승부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제작 기간은 1년, 총제작비는 10억 원이었다. 한 작품당 2억5,000만 원이 배정됐다. 장 감독과 김정우 감독이 대결에 나섰다. 김 감독은 코미디영화 ‘구세주’(2006)와 ‘최강로맨스’(2007)로 이름을 알린 영화인이었다. 코미디쪽에서 재능을 드러내고 장편영화 두 편을 각기 연출한 감독이니 결투의 모양새가 그럴 듯했다. 이벤트 명은 ‘코믹배틀-장 감독 VS 김 감독’이었다.
장 감독은 ‘전투의 매너’와 ‘음란한 사회’로 출사표를 던졌다. '전투의 매너'는 아침 식사로 순댓국을 좋아하는 남자, 커피와 샌드위치를 즐기는 여자의 사랑을 그렸다. 취향도 성격도 다른 남녀가 잠자리에서만큼은 서로 통한다는 설정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강경준과 서유정이 주연했다. ‘음란한 사회’는 좀 더 도발적인 내용이 화면을 채운다. 사기를 당한 고지식한 학원강사 등 세 남자가 성인용품 판매에 나섰다가 겪게 되는 일을 다뤘다. 장 감독의 서울예대 연극과 동기인 배우 김진수가 주연을 맡았다.

김정우 감독은 ‘색다른 동거’와 ‘성 발렌타인’으로 맞섰다. 여자 귀신이 평범한 남자를 가르쳐 카사노바로 변신시킨다는 내용, 연애 초보 여교수와 띠동갑 제자가 나누는 사랑이야기를 각각 담았다. ‘색다른 동거’는 배우 김혁과 정시아가, ‘성 발렌타인’은 이지현과 이용주가 각각 주연했다.
한국 영화사에서 전례가 없는 이색 대결의 승자는 누구였을까. 성과 코미디를 내세운 두 감독 중 누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을까. 결과는 일방적이지 않으면서도 일방적이었다.
이례적인 영화 대결...결과는 2대0

일단 극장에서의 대결 결과. 장 감독의 ‘전투의 매너’는 전국 17개 스크린에서 관객 1,788명을 모았다. 김 감독의 ‘색다른 동거’는 17개 스크린에서 2,780명이 봤다. ‘색다른 동거’가 1,000명 가량을 더 동원하며 승리했다.
TV 시청률 다툼에서도 김 감독이 반 발 정도 앞섰다. 시청률조사업체 AGB닐슨미디어리서치에 따르면 김 감독의 ‘성 발렌타인’이 시청률 1%를 기록해 장 감독의 ‘음란한 사회’(0.4%)를 눌렀다. 차이가 크지 않은 승부였으나 결과는 2대0으로 김 감독의 승리였다.
장항준 감독은 유례 없는 대결에서 졌다고 해도 여러 성과를 남겼다. 초저예산 TV영화라고 하나 ‘불어라 봄바람’ 이후 5년 만에 메가폰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음란한 사회’는 첫선을 보인 지 18년이 지나 개작을 통해 연극 ‘핑크트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스타릿홀에서 다음 달 1일 첫 막을 올린다. 사기 당하는 학원강사를 공무원 시험 장수생으로 바꾸는 등 내용이 달라졌다. ‘핑크트럭’은 새롭게 영화화할 가능성도 열려있다.
‘TV영화 배틀’ 이후 장 감독은 새 영화 ‘깊은 산 먼 친척’을 준비했다. 구미호 전설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판타지 영화였다. 구미호들이 사람으로 둔갑해 인간사회에 섞여산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느 산속 구미호 거주 마을이 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구미호들이 새 보금자리 마련을 위해 도시로 나가 돈을 벌면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할리우드 영화 ‘맨 인 블랙’ 시리즈와 일본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을 떠올리게 한다.
‘깊은 산 먼 친척’은 2007년 경북도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주목받았으나 영화화되지는 못했다. 장 감독이 이전에 연출하려 했던 ‘꿈의 시작’과 ‘메이드 인 홍콩’처럼 서랍 속 시나리오 신세로 전락했다.
거듭된 좌절 속 방송 안착 기회 얻어

좌절이 거듭됐다. 장 감독은 사회초년병 시절 이후 10년여 만에 다시 방송가에서 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10년 tvN 드라마 ‘위기일발 풍년빌라’의 극본을 아내 김은희 작가와 함께 쓴다. 오래전 집을 나간 아버지가 물려준 낡은 빌라에 들어가 살게 된 한 남자의 사연을 그린 스릴러물이었다.
장 감독은 ‘위기일발 풍년빌라’를 디딤돌 삼아 SBS 드라마 ‘싸인’(2011)의 극본과 연출을 맡게 된다. 극본은 역시 아내와 함께 했다. 영화쪽에서 활동이 꽉 막혀있던 장 감독의 재능이 의외로 방송쪽에서 빛을 보게 된 거다.
장 감독은 드라마 극본과 연출을 맡기 전 방송인으로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다. SBS 영화 소개 프로그램 ‘접속! 무비월드’의 한 코너를 진행했다. 2010년에는 KBS 예능프로그램 ‘밤샘 버라이어티 야행성’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드라마 극본을 쓰고 연출을 하는 한편 프로그램 진행까지 하고 틈틈이 단역으로 드라마 출연까지 했으니 만능 방송인이라는 수식이 붙을 만했다. 그렇게 장 감독은 영화와는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장 감독은 ‘기억의 밤’(2017)으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장 감독이 방송계에서 맹활약할 수 있었던 건 시대 변화와 무관치 않다. 2000년대 후반 국내 방송가는 지상파TV에서 케이블TV로 권력이동이 이뤄지던 시기였다. 지상파와 달리 상대적으로 덜 진지하고 덜 엄숙한 케이블TV의 부상은 장 감독처럼 조금은 발칙한 유머가 가능한 이들의 활동폭을 넓혀줬다. 하지만 장 감독은 방송만 전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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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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