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봄을 마시는 법…차에도 제철이 있다

벚꽃 명소를 찾거나 봄나물을 무쳐 먹고, 산뜻한 옷을 꺼내 입는다. 왕성한 생명력의 계절, 각자의 방식으로 새봄을 맞는다. 그 계절을 입안으로 들이는 순간, 봄은 비로소 몸 안에 들어온다.
요즘 서울 종로구 서촌 라운지에서 ‘마시는 봄’을 경험할 수 있다. 제주 서귀포의 프리미엄 티하우스 회수다옥이 ‘서울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제주의 봄’을 주제로 두 달간 팝업 행사를 진행한다. 팽주의 설명과 함께 제주 회수다옥의 맡김차림을 재구성한 차(茶)림 프로그램을 체험하는 것이다. 지난 2일 서경애 회수다옥 대표의 안내와 함께 봄 차를 맛봤다.

“쑥차는 온도가 중요해요. 70~80도에서 짧게 우려야만 쑥의 단맛을 느낄 수 있어요. 뜨거운 물에 오래 두면 쑥국이 돼버리거든요.”
- 서경애 회수다옥 대표

언 땅을 뚫고 나와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쑥이 첫 잔을 채웠다. 제주 대표 도예가 김수현 작가의 귀다리잔에 담긴 ‘어린쑥차’에서 “달큼하고 진한 토종 허브의 향”이 넘실댔다. 코로 들어온 풀 향은 이내 산뜻한 맛으로 입안을 훑고 지나간다. 쑥국과는 다른 투명한 질감이다. 건조 상태의 차에 제철이 있느냐 싶은 의구심은 따뜻한 쑥차 한 모금에 눈 녹듯 사라졌다. 겨울철 눈 덮인 제주 돌담밭을 상징하는 접시 위에 각 코스의 차에 곁들이는 티푸드가 놓였다. 제주산 녹두 앙금으로 만든 녹두란과 청귤로 만든 다식이 쑥차의 짝꿍이다.

두 번째 차는 제주덖음차. 강한 불에 볶아낸 찻잎에서 구수한 향이 올라온다. 1000도가 넘는 고온에서 전통 방식으로 구워낸 김성실 명인의 옹기 잔은 떫은맛을 흡착해 부드러움을 더한다. 덖음차는 따뜻한 차 외에도 차갑게 우린 콜드브루, 우유를 넣은 밀크티로 변주된다.
온도가 바뀔 때마다 향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같은 잎이 이렇게 다른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세 가지 차를 마시며 제주도 떡집 열두 군데를 돌아 엄선한 오메기떡과 직접 만든 한라산 표고버섯 정과, 제주에는 없는 곶감을 오마주한 감귤 정과를 차례로 맛보면 된다.

“호지차의 방식으로 만들었지만, 제주덖음차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느 호지차처럼 묵은잎을 사용하지 않고 해차와 줄기로 만들기 때문이에요. 센불에 로스팅한 차라 커피에 익숙한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차예요. 잎차 중에서는 카페인이 가장 적습니다.”
코스의 마지막은 제주목련꽃차다. 목련이 완전히 피기 전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봉오리를 따서 수술을 제거하고 찐 뒤 은근한 불에서 말린 정성의 집약체다. 체온이 닿으면 꽃잎이 시커멓게 변하는 터라 마치 ‘초밥왕’처럼 찬물에 손을 식혀가며 꽃잎을 편다. 서 대표가 하루 전 제주에서 공수해온 햇목련꽃차는 따뜻한 물에서 활짝 피어나며 은은한 향과 맛을 냈다. 한 송이로 1ℓ는 너끈히 우릴 수 있다.
“목련은 ‘신이화’라고 해서 한의학에서도 오래 쓰여온 재료예요. 이름(辛夷花)처럼 매운 생강 향도 품고 있지요. 호호 불어가면서 두 잔 연거푸 드시면 코와 목이 시원해질 거예요. 외국 손님들은 목련꽃을 감기약으로도 쓴다고 해요.”

여기엔 하우스가 아닌 ‘원래 제철’에 발맞춰 자란 제주 노지 딸기로 만든 양갱과 초록색 말차 양갱, 약과가 페어링됐다. 이 코스가 흥미로운 이유는 제철 차의 감각을 또렷하게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1시간 동안 부지런한 제주의 봄맛을 맛볼 수 있는 4월 프로그램은 오픈 당일 한 달 치 예약이 완료됐다. 취하는 술보다 취향을 반영해 즐길 수 있는 차 문화가 젊은층에서도 ‘힙’해진 덕분이다. 서 대표는 “마니아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차의 본격 제철은 5월”이라고 전했다. 5월 예약은 오는 25일부터 받는다.
다음달 올해 첫 백차가 나온다. 그해 첫 어린 찻잎을 따서 덖지 않고 말린 백차는 풋풋하고 달콤한 맛이 난다. 마니아들이 ‘수제 차의 진수’라 부르는 이유다. 절기상 곡우 이전에 채취한 우전, 입하 전 따서 참새의 혀처럼 가늘고 작다고 하여 세작이라 불리는 이른 녹차는 그래서 더 귀하다.
블렌딩 차도 계절의 제맛을 더한다. 벚꽃, 복숭아꽃, 매화차, 목련꽃차가 초봄을 장식하고 난 뒤 “제주의 봄 향기를 책임지는 귤꽃”으로 착향한 귤꽃녹차, 귤꽃홍차를 낸다. 5월에는 무화과잎차를 만날 수 있다. 바닷가 근처에서 피는 분홍빛 해당화도 차로 일품이다. 여름에는 찔레꽃과 치자꽃이 착향차 라인업에 가세하고, 가을이면 감국, 동국 등 국화차가 이어진다. 겨울이면 귤껍질을 3년 숙성한 진피가 그 자리를 채운다.

“서귀포 중산간에 있는 김맹찬 농부의 유기농 야생차밭에서는 차나무가 6m까지 자랍니다. 기계로 잎을 채취하느라 키를 낮게 유지하는 차밭과 달리 이곳에서는 주렁주렁 차꽃이 펴요. 그 꽃으로 가을이면 차꽃 블렌딩 제품을 냅니다.”
서 대표는 사실 20여년간 식품 분야에서 홍보 업무를 맡아온 베테랑이다. 그 역시 한때는 팔팔 끓는 물에 티백을 푹 담가 회의 내내 마셨던 “세상 맛없는 녹차” 애용자였다. 제주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는 일에 몰두하다가 회수다옥을 준비하면서 어느새 차 달인이 됐다.
요즘은 메뉴판을 놓고도 무슨 차를 골라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차는 수확 시기와 가공 방식에 따라 녹차, 백차, 홍차 등으로 나뉜다”는 기초부터 “언제 땄느냐, 어떻게 시들게 했느냐, 어떻게 상처를 냈느냐, 얼마나 우리느냐에 따라 차의 색과 맛이 달라진다”는 실용 정보를 전하고 있다.

“이 계절에 피는 꽃을 본다는 것, 꽃그늘을 걸어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복 받은 거 아닐까요. 그걸 눈으로 보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찬란한 계절이 만들어낸 기록을 온몸으로 먹는 거잖아요. 제철 차를 마시는 건, 그래서 굉장히 중요한 삶의 기쁨이죠.”
- 서경애 회수다옥 대표
서 대표는 제철 차를 ‘테루아’를 중시하는 와인에 비유했다. 사계절이 분명한 지역에서는 그 계절이 주는 축복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제주에서 거둔 차와 티푸드로 내는 회수다옥의 맡김차림을 꾸렸다. 이 프로그램 덕분에 최근 2026 한국관광공사 우수 웰니스 관광지로 선정됐다.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그 계절을 온전히 느끼는 시간을 제공한다”는 서 대표의 선언은 벚꽃잎이 날리는 바깥바람을 맞으며 실감이 났다. 1시간 전보다 봄이 훨씬 또렷해졌다.
장회정 선임기자 longcu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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