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독재자’ 할아버지는 예능을 경시하고 ‘탄압’했다


밀양 삼문동, 1954~56년
할아버지는 적어도 자신의 직할성인 화남정사 경내에서만은 철저한 독재자였다. 공맹지학(孔孟之學)을 벗어난 일체의 사학(邪學)은 발들일 수 없고, 예능은 경시를 넘어 탄압의 대상이었다. "시로 흥하고, 예로 세우며, 음악으로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라는 공자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셨을까?
그러나 할아버지의 학문 독재는 화남정사 밖에서는 전혀 위력이 없었다. 둘째 중부는 동경 유학 시절에 바이올린을 켰다고도 하고 해방 후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그분의 아들도 기타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한참이나 세월이 지난 뒤인데도 할아버지와 침식을 함께 한 큰집 종형제와 우리 형제만이 엄격한 예술 통제를 받았던 것이다.
나는 그림에도 재능이 없었다. 습자 글씨도 결코 빼어난 편이 못 되었다. 한 학년 위인 큰집 형은 그림 솜씨가 빼어나 학교 교실 게시판에는 항상 그의 그림이 붙어 있었다. 당시에 〈그림 이야기〉라는 장르의 소년용 도서가 유행했다.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와 같은 멜로물과 박기당의 《역사 이야기》 등등이 생각난다.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서 나는 그림은 감히 흉내낼 수 없지만 이야기는 가끔 내 버전으로 상상해 보았다. 나는 형에게 내가 이야기를 쓰고 형이 만화를 그려 〈그림 이야기〉를 함께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손을 '환쟁이'로 만들 수 없는 할아버지와 백부 앞에 내놓고 말할 수 없었다.

공설운동장 풍경: 싹불이와 날나리
'소전껄(소전거리)'은 삼문동의 변방으로 이름 그대로 우시장이 열렸다. 아마도 2일, 7일 닷새마다 열리는 밀양 장날에 맞추어 개장했을 것이다. 밀양에 소싸움이 성행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소전 인근에는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많았다. 잠자리의 집단 서식처이기도 했다. 소전껄 아이들의 여름철 최대 오락 중의 하나가 잠자리 사냥, 그중에서도 '왕철기' 포획이다. 암놈을 먼저 잡아, 채 끝에 달린 쇠꼬리털에 매달아 채를 빙빙 돌리면서 수놈을 유인하면서 주문을 왼다. "구리 구리, 마구리, 이놈의 수캥이 눈 멀었나… 청상 방구리 씹이여!"
가까이 지내는 한 후배는 요즘도 거나하게 취하면 60여 년 전의 주문을 재생해 낸다. 약산 김원봉의 5촌 조카라는 이유로 평생 직장을 갖지 못한 설움이 그를 음유시인으로 만들었다.
잠자리는 경상도 일대에서는 '철기' '철구' '철갱이' 등으로 불렸다. 진영 소년 김윤식은 해방 후에 처음으로 한글을 배운 학교에서 잠자리를 그려 오라는 숙제를 받고 이불과 베개를 그렸다는 일화가 있다. '철기'의 표준말이 잠자리인 줄 몰랐던 것이다. 통영 태생인 박경리의 시구절에도 '철기'가 등장한다.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면서 "여름에는 철기 날개 같은 모시옷을" 입었다고 썼다.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 2008, 50~55쪽.)
삼문동 중심가에 살던 나는 변방인 소전껄 나들이가 쉽지 않았다. 그 동네 아이들은 거칠고 텃세가 심했다. 그래서 사촌 형의 동행이 필요했다. 소전껄 입구에 있는 셋째 중부 댁은 삼문동 제1의 저택으로 '안부자집'으로 불렸다. 정침 좌우로 별채를 거느린 적산가옥이었다. 정원에는 등나무 넝쿨로 덮개를 씌운 널찍한 연회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좌측 별채에는 광과 목욕탕, 그리고 부속건물인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넓은 채전에는 유실수도 많았다. 나는 이 집에서 중학교 3학년 때 1년 동안 기거했다. 중부는 삼문동 들판에 널찍한 토마토밭을 소유하고 있었다. 가끔 사촌 형들의 인도 아래 손수레를 끌며 토마토밭 나들이를 즐긴 기억이 생생하다.
삼문동 전체의 중심은 공설운동장이다. 주위에 조성된 둑방길과 송림이 운치를 더해준다. 공설운동장 화장실에는 '달걀귀신'이 살고 있다는 속설이 혼자 용변을 보는 아이들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운동장 입구 연도에 '감람나무' 기도소가 있었다. 박태선 장로가 세운 신앙촌의 밀양지부였다. 전쟁으로 삶의 보금자리를 잃은 월남민들의 절망과 희망을 함께 품어 준 신앙촌 신도가 밀양에도 늘어났다. 밀양 토박이들에게 감람나무는 풍자와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믿음의 징표로 교주의 발 씻은 물을 마시게 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어머니가 신자인 한 아이는 '감람나무, 미친갱이'라는 급우들의 조롱을 견디다 못해 무단결석하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가 연 '가람양재점'이 혹시 감람나무와 연관 지어 불릴까 봐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소싸움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군민의 도락이었다. 사람들은 소싸움 자체보다 본부석에서 울려 퍼지는 다급한 마이크 소리를 더욱 흥겨워했다. "싹불이, 암소 준비해라!" 출전한 황소가 제대로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 발정 난 암소를 끌어들여 대결을 촉진한다. 아이들은 동물 세계의 성적 삼각함수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을 것이다.
'싹불이'는 '짝불알', 즉 두 개의 고환 사이즈가 다른 사내를 비하해서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의 운동장 '싹불이'는 소년이 아니라 중노인이었다. 당시에는 외과 수술이 쉽지 않아 한쪽 고환이 탈장인 상태로 어른이 된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사람의 신체적 약점을 공공연히 지목하는 폭력적 언어가 일상에서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싹불이'란 '삯을 주고 부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소나 말을 돌보는 아이를 지칭했다는, 문헌적 근거 없는 이설(異說)을 내세우는 향토 문인도 있다. 하기야 한 세대 위 소설이나 민담 속에는 '싹불이 영감'이란 캐릭터가 심심찮게 나온다.
1960년대 나의 중학 시절에는 소싸움이 시들해진 것 같다. 4.19와 5.16을 겪으며 삶도 바빠지고 가파른 산업 근대화의 길을 내딛으며 목가적 옛 풍습은 급격히 쇠퇴했다. 밀양의 명물로 알았던 소싸움이 이웃 고을 청도에서 대규모로 부활한 것은 나라 살림이 한결 넉넉해지고 난 후의 일이다.
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행사 중에 뭐니뭐니 해도 가장 인기 있는 단체경기는 축구였다. 당시 밀양에는 '날나리'라는 스타 플레이어가 있었다. 이미 중년이 넘은 한물간 사람이었다. 일제시대 경평축구시합 (경성 팀과 평양 팀 사이의 친선경기)에 출전한 전력이 있다고 했다. 실력보다 요란한 몸놀림이 구경거리였다. 행동거지가 날나리처럼 경박하다고 붙인 별명이라고도 했다. 경기 중 시종일관 "날! 날!", 즉 나에게 공을 패스해 달라는 주문을 연발하여 붙여진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날날이'와 '싹불이'는 밀양읍 나의 동년배들이 공유하는 시대의 부호다. 우리에게는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위해서》에 나오는 마들렌 과자 같은 존재였다. 요즘도 밀양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소년 시절의 정체를 재확인하는 암호로 사용한다.
공설운동장을 나와 북으로 내일동 배다리쪽으로 걷다 보면 오른편 샛길에 몇 채의 신식건물이 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삼성의원이었다. 김형달 원장은 일제 강점기부터 민족사상에 충만했고 해방 직후에는 여운형의 건준 밀양지부 설립에도 관여하면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안재구, 《끝나지 않은 길 1권: 가짜 해방》, 내일을 여는 책, 2013, 20쪽.) 그는 의사인 진보당의 박기출 씨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백민 황상규 선생의 아들로 외사촌 형 김원봉을 따라 월북했던 황용암씨가 이내 남으로 돌아와서 입지가 마땅치 않자 김 선생은 황 씨를 병원 조수로 채용하여 보살피기도 했다. 김 선생의 사위와 아들도 의사가 되어 널리 인도적 활동을 한 것으로 들었다. 통영 출신의 빨치산 대장 방준표(1906-1954) 씨도 밀양에서 은신하다 해방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래저래 밀양은 특정 주의나 계파에 무관하게 독립운동에 관여한 사람들을 품어 주는 지식인의 인맥과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다. 의사가 된 방준표의 막내아들은 고등학교 때 나와 한 반이었다. 그는 조용한 모범생이었고 동급생 누구도 그의 숨은 가족사를 알지 못했다.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