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구구식 가격 누르기… 정유사들, ‘빚더미’ 한전 꼴 난다

10일 전국 주유소 평균 휘발유 가격은 L(리터)당 1989원, 경유는 1982원으로 이란 전쟁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서울도 휘발유 2023원, 경유 2008원으로 전쟁 이후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했다. 그런데도 주유소에는 차가 몰리고 있다. 정부가 가격을 눌러놨기 때문이다.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3월 13일) 한 달이 됐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는 충격 속에 정부가 전격적으로 꺼낸 카드다. 당장의 서민 부담 완화 효과는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주먹구구식 가격 결정과 수요를 자극하는 역설이 겹치면서, 전문가들과 업계에선 “3~4년 전 한전의 대규모 부채를 불렀던 전기 시장의 실패가 정유 시장에서 되풀이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가격 책정 기준 모호, 수요는 몰려
고유가 위기에는 에너지 소비가 줄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한국은 예외다. 한국석유관리원에 따르면, 최고가격제가 시행된 3월 3주부터 4월 1주까지 3주간 전국 휘발유 판매량은 84만8619㎘(킬로리터)로, 작년 같은 기간(84만6511㎘)보다 늘었다. 국제 유가는 폭등하는데 소비가 오히려 증가한 것이다. 김종대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내 기름값이 국제 가격 대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인식이 형성되면서 수요가 증가하는 시장 왜곡이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2주 갱신 주기가 만들어내는 ‘갱신 전날 가수요(假需要)’도 반복되고 있다. 최고가격 인상 발표 전날이면 전국 주유소에 차가 몰리는 것이다. 한국은행도 “최고가격제 도입 기간이 길어질수록 초과 수요 발생 등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 세계 경제 규모 상위 15개국 중 석유 최고가격제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는 전쟁 전에도 정부가 가격을 조정해온 중국을 제외하고는 한국이 유일하다. 미국·독일·일본은 유류세 인하, 에너지 바우처, 전략 비축유 방출 등 간접 수단을 택했다. 직접 가격 통제가 부작용이 따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 정부의 최고가격제는 사실상 예측 불허인 구조다. 정부는 ‘국제유가 상승분과 유류세 인하폭을 반영한다’는 원칙을 내세웠지만 국제 가격 인상분은 국내 상한에 절반도 채 반영되지 않았다. 산업통상부는 ‘갑작스러운 변수(국제유가 변동)가 발생해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지만, 사실상 ‘사정 봐서 정한다’는 의미다. 정치적 고려에 따라 결정될 여지가 열려 있는 셈이다.
◇정유업계 ‘석유판 한전 사태’ 우려
전문가들이 가장 걱정하는 시나리오는 ‘석유판 한전 사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정부는 발전 원가가 폭등하는데도 한전의 전력 구매 가격에 상한을 두고 요금 인상을 억제했다. 전기 요금이 원가를 반영하지 못하면서 전력 소비는 오히려 전년 대비 2.7% 늘었고, 이는 다시 에너지 수입 급증으로 이어져 한전의 대규모 부채와 산업용 전기요금 폭등(3년 반 만에 70%)으로 이어졌다.
정유 시장이 그때와 닮은꼴이다. 정부는 정유사들에 “원유 부족 사태가 없도록 비싸더라도 무조건 들여오라”고 압박하면서 판매가는 낮게 묶어두고 있다. 한전이 겪었던 ‘역마진의 늪’과 판박이다. 소비자는 당장 싼 기름을 넣지만 그 차액은 결국 세금으로 메워질 전망이다. 정유사의 손실 보전을 위해 정부가 편성한 예비비가 4조2000억원이다. 정유업계는 실제 손실 규모가 그보다 클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 정유사는 설비 투자나 노후 시설 교체를 미루게 되고, 이는 석유 제품 공급망 약화로 이어진다. 표심을 의식한 최고가격제는 결국 ‘폭탄 돌리기’인 셈이다.
수조원대 잠재 손실이 누적되고 있지만, 1분기 정유 4사(SK이노베이션·에쓰오일·GS칼텍스·HD현대오일뱅크)는 대규모 흑자를 낼 전망이다. 국제 유가가 급등하면서 원유 재고 가치도 덩달아 뛴 덕분이다. 실제 현금이 들어온 게 아니라 ‘장부상 흑자’로, 유가가 꺾이는 순간 그만큼의 손실로 돌변한다. 정유업계는 2023년 하반기 유가 급락 때 분기당 5000억~8000억원의 재고평가손실을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대규모 흑자’가 공개되면 정유사들은 ‘전쟁 위기에도 폭리를 취했다’는 비판과 함께 횡재세 도입 논의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정유사들로선 딜레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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