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프리즘] 노라 노, 못 다한 이야기

서정민 2026. 4. 11.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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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문화에디터
지난 3일 BTS의 특별한 숏폼 미니 다큐멘터리 ‘KEEP SWIMMING with BTS’가 공개됐다. 5집 앨범 ‘아리랑’의 타이틀곡 ‘SWIM(스윔)’이 품고 있는 핵심 메시지, “멈추지 않고, 계속 헤엄치는(KEEP SWIMMING) 행위 그 자체만으로 이미 충분하고 훌륭한 전진”임을 실천한 인물과 그 삶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다. 첫 번째 주인공 박찬욱 영화감독에 이어 두 번째로 소개된 인물이 노라 노 패션 디자이너다.

「 BTS와 백수 앞둔 디자이너 공통점
70년 뛰어 넘는 ‘아리랑’ 도전 정신

대한민국 1세대 패션 디자이너이자 올해 98세인 현역 디자이너.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처럼 자아를 찾아 독립된 여성으로서 한길을 꾸준히 걸어온 당찬 여성. 그녀와 BTS는 ‘아리랑’이라는 공통분모도 있다. 노 디자이너가 1950년대 초부터 갑사·양단 등의 한복 원단과 금박·은박 등의 한복 모티프를 기본으로 디자인한 이브닝드레스 이름이 바로 ‘아리랑 드레스’다. “외교관 부인들이 한복 말고도 파티복이 필요하다고 해 한복 라인을 따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이브닝드레스를 만들고 누구나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쉽게 ‘아리랑’이라 이름 붙였죠.”

7월 16일까지 경운박물관에서 열리는 ‘노라 노 Nora Noh: First & Forever’전에 가면 입구 프롤로그 섹션에서 아리랑 드레스의 여러 버전 사진과 실물을 만날 수 있다. 전시기획을 맡은 서영희 감독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서구적 사교 현장에 완벽히 어울렸던 아리랑 드레스와 일찌감치 영어를 배우고 혈혈단신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도전 정신이 지금의 노라 노를 있게 했다”고 소개했다. 아리랑 드레스는 2014년 10월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613호로 지정됐다.

흔히 ‘패션’이라고 하면 화려함을 좇는 일로만 생각되지만 노라 노의 패션은 여성의 품격과 자유로움이 먼저였다. 노라 노와 각별한 인연인 1965년 미스코리아 선 최승자씨의 딸로, 노라 노의 패션세계를 연구하고 논문까지 쓴 한수영 의류학 박사는 “국산 원단 수준이 척박했던 1950~70년대, 노라 노는 단순히 디자이너의 수준을 넘어 국산 원단 생산가로서의 역할도 해낸다. 덕분에 우리 면직·모직·견직물의 수준이 한 단계 오른 것은 물론이고 한국의 패션 수준도 올라갔다”며 “그가 기성복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노라 노는 1963년 명동 미우만 백화점(구 미도파 백화점)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기성복 패션쇼를 열었다. 의상실에서 맞춤복을 만들며 수많은 여성의 사이즈 데이터를 축적해 ‘한국 여성 표준 사이즈’ 기준을 만든 결과다. 돈 있는 이들은 고급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지만 서민들은 옷감을 사서 직접 옷을 만들어 입거나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구제 옷을 입어야 했던 시절, 상점에서 자신의 체형에 맞는 옷을 이리저리 골라 입어보고 구매할 수 있는 ‘기성복’이란 얼마나 놀라운 혁신이었던가!

누구보다 시대를 앞서 살았던 그녀가 요즘 집중하고 있는 것은 “과거 신세진 사람들을 찾아가 고마웠다고 인사하는 일”이다. “둘 다 싱글이라 주말이면 우리집에서 함께 지낸 친구가 어느 날 불쑥 내게 큰 절을 하는 거예요. ‘내 정신이 온전할 때 꼭 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어. 노라야, 네 덕분에 단조로울 수 있었던 내 인생이 풍요로웠어. 고마워’라면서 말이죠. 몇 해 후 그 친구는 세상을 떠났는데 만약 그때 그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면 그 친구가 나와 함께한 시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영원히 몰랐겠죠.”

수십 년의 가위질에 거칠어진 손으로 고마운 사람의 리스트를 만들고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노 디자이너. 그녀의 느리지만 고요하고도 행복으로 충만한 하루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머리를 스친다.

서정민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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