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모녀 여행

2026. 4. 1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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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파리에 왔다.

천만 원을 넘게 써서 도착하자마자 나빠진 엄마의 안색을 보고 생각했다.

천만다행으로 엄마는 투어를 마음에 들어 했다.

엄마의 표정 하나하나에 조바심을 내는 나도 이때만큼은 마음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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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 함께하는 순간도
부의 정점 누리는 세계도
지금이 끝일지 모르지만…
"오늘? 너랑 있어서 좋았지"
엄마의 말만큼은 못 잊을것
이희주 소설가

엄마와 파리에 왔다. 십 년 만에 함께한 해외여행이다. 나도 여행 경험이 적기에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추가 요금을 내고 넓은 좌석을 골랐다. 비행기에서 쓸 아이마스크와 가습마스크, 종아리 압박스타킹, 목베개를 사고 작은 병에 수분크림도 담았다. 불편함 없이 14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쳤다. 의기양양하게 파리에 도착했는데 문제는 숙소였다. 물가를 전혀 몰랐던 탓에 한국에서 적당한 가격대의 숙소를 고른 것이 전혀 적당하지 않았던 거다. 천만 원을 넘게 써서 도착하자마자 나빠진 엄마의 안색을 보고 생각했다. 정말 죽고 싶다….

엄마와 딸은 서로에게 최후의 식민지다. 딸은 엄마의 비밀 항아리로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할 수치를 전수받는다. 반면 딸 가진 많은 엄마들은 끝나지 않는 식모살이를 한다. (아들 엄마는 길바닥에서, 딸 엄마는 부엌에서 죽는다는 건 참 뼈아픈 농담이다.) 종종 교환의 꼴을 갖는 이 양방향 착취에 나 또한 관여 중이다. 이번 여행도 말하자면 효도의 탈을 쓴 빚 청산이었으나 도착해보니 내가 준비한 대부분이 엉터리라 기가 팍 꺾였다. 깜찍하게 커플 티셔츠를 맞춰 입진 못해도 최소한 불편하지만은 않게 지내다 갔어야 하는데. 후회해도 늦었다. 내가 작가로서 어떤 불행도 글감으로 써먹을 수 있는 것과 달리 엄마는 그렇지 않다. 떠나온 인간은 보다 나은 삶을 원한다. 약속된 천국의 열매 한 알을 미리 따먹어야 하는 게 여행인데 엄마를 전기포트도 없는 낡은 숙소에 묵게 했다. 서울의 마트에서처럼 1유로 차이를 셈하게 만들었다. 미숙함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없는 실패다.

천만다행으로 엄마는 투어를 마음에 들어 했다. 처음엔 시간에 맞춰 쫓겨 다녀야 하니 별로일 거 같다고 했으나 막상 타지에서 한국인을 만나니 무척 기뻐했다. 가이드가 사진을 요청하면 가장 먼저 카메라를 내밀고, 지하철에 빈자리가 나면 얼른 와 앉으라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걸으며 노래를 부르거나 선한 인상의 신혼부부가 곧 스위스로 넘어간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엄마의 표정 하나하나에 조바심을 내는 나도 이때만큼은 마음이 편했다. 파리에서 네 시간이 넘게 떨어진 몽생미셸에 가는 차 안에선 단잠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눈을 감고 있는 엄마의 옆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여기에 오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인지 모른다. 엄마는 나이가 들었고, 체력도,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몽생미셸의 수도원을 올라가는 계단에서도 중간중간 오래 쉬어야 했다. 비단 엄마뿐만이 아니다. 내가 숙소 컨디션과 투어 일정, 지하철 연착을 체크하며 전전긍긍하는 동안 세계 역시 매 순간 허물어지고 있었다. 평범한 우리가 해외여행을 하는 지금은 인류가 정점의 부를 누리던 시절 최후의 불꽃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 냉정한 비관에 젖어 한때는 들어오면 평생을 나갈 수 없던 뻘밭의 수도원을 거닐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성지. 천장이 높은 거대한 홀에 앉아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전쟁을 멈추게 해주세요. 그리고 그보다 간절하게 이렇게 빌었다. 시간이 없으니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게 해주세요. 그래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아닐까? 일과 예술? 가족과 생활? 지구와 환경? 문제를 분리하는 일이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누군가 내게 셋 중 하나를 고르라고 물을 때의 내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걸 여기서 말하진 않을 거다. 다만 현지투어 차량에 오르기 위해 돌아오던 길, 오늘은 뭐가 좋았냐고 묻는 물음에 한 엄마의 답은 모든 게 허물어진 뒤에도 기억할 거다.

엄마는 그냥 우리 희주랑 이렇게 있는 게 좋아. 평소엔 바빠서 얼굴도 제대로 못 보잖아.

[이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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