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혈로 HPV를 검출한다[김정호의 생명과 환경](11)

2026. 4. 1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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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경부암은 정기적인 검사와 예방접종으로 조기 발견과 발생률을 낮출 수 있다./픽사베이

질병을 빠르고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해서는 보통 값비싼 의료장비와 정교한 검사 과정이 필요하다. 때로는 환자의 몸에서 직접 조직이나 혈액을 채취해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유용한 발견이 시작된 사례도 적지 않다. 너무 익숙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물질이 질병 진단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기도 한다. 최근 연구자들이 눈을 돌린 대상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연구자들은 질병 진단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생리혈에 주목했다.

흥미롭게도 여성의 생리혈을 이용하면 인유두종 바이러스(HPV)를 검출할 수 있다. HPV는 자궁경부암의 주요 원인이다. 이러한 기술이 실제 의료 시스템에 도입될 경우, 자궁경부암 검진을 위한 HPV 검사 방식은 근본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 발견은 단순한 기술 개선에 그치지 않는다. 그동안 여성들은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검진 절차로 인해 자궁경부암 검사를 충분히 받지 못했다. 하지만 생리혈을 진단 샘플로 활용한다면 여성의 검진 참여율을 크게 높일 방안이 될 수 있다.

자궁경부암, 예방 가능한 질병이지만 아직 남아 있는 장벽

자궁경부암은 자궁의 경부(입구)에 발생하는데, 정기적인 검사와 예방접종으로 예방과 조기 발견이 가능하다. 이는 발생 원인이 잘 규명돼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자궁경부암은 HPV 감염으로부터 시작된다. HPV는 흔한 바이러스로, 주요 전파 경로는 성 접촉이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HPV 감염은 자연적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일부 고위험군의 HPV는 자궁경부 세포의 DNA에 변화를 일으켜 돌연변이를 유발하고, 이것이 축적되면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

자궁경부암의 발생 기전이 규명되면서 암 검진을 위해 두 가지 주요 검사 방법이 활용됐다. 한 가지는 자궁경부 세포를 채취해 비정상 세포를 병리학적으로 확인하는 ‘Pap smear test’로 알려진 자궁경부 세포 검사다. 질경이라는 도구를 삽입해 자궁경부 세포를 솔로 채취한 뒤, 현미경으로 비정상 세포 유무를 판별하는 검사다. 또 다른 방법은 고위험 HPV DNA를 직접 검출하는 HPV 검사다. 자궁경부 조직에서 DNA를 분리한 후 PCR 방식으로 HPV 감염 여부와 HPV 유형을 확인한다.

이 두 검사는 자궁경부암 검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실제로 우리나라를 포함해 많은 국가에서 정기적인 검진 프로그램이 도입된 이후 자궁경부암 발생률이 크게 감소했다.

전자현미경으로 본 인유두종 바이러스(HPV). 미 국립암연구소

하지만 자궁경부 세포 채취 방식에 대해 여성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여전히 크다. 검사를 위해 신체의 사적인 부위를 노출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불편함을 유발한다. 검사 시간은 짧지만, 검사 도구를 삽입하는 것에 대해 불쾌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일부 문화권에서는 이런 검사가 여전히 금기로 여겨지고 있다. 이 외에도 의료 인프라가 취약한 국가에서는 병원 접근성이 낮아 자궁경부암 검사를 받기조차 쉽지 않다.

세계보건기구 통계에 따르면 자궁경부암은 여전히 전 세계 여성들에게 흔하게 발생하는 암 가운데 하나이며, 많은 경우 조기 발견이 이뤄지지 않아 치료가 어려워진다. 이러한 한계를 개선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보다 간편한 검진 방법을 모색해왔다.

생리혈이라는 예상 밖의 진단 시료

흔히 여성의 생리혈을 단순한 혈액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조성을 가진 생물학적 시료다. 여성의 생리 과정은 배란 후 일정 기간 수정이 이뤄지지 못했을 때 자궁내막이 탈락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생리혈 속에는 자궁내막 조직뿐 아니라 질 상피세포, 자궁경부 세포 그리고 다양한 질 내 미생물이 포함돼 있다. 자궁경부 세포 검사를 위해 채취하는 자궁경부 조직의 세포가 생리혈 속에 포함된 것이다. 만약 이 세포들이 HPV에 감염돼 있다면, 바이러스 DNA 역시 생리혈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이는 생리혈을 비침습적 선별 검사를 위한 유용한 시료로 활용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비침습적 진단은 피부 절개나 기구 삽입과 같은 신체 손상 없이 질병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자궁경부암 예방에서 전문가들이 가장 걱정하는 문제는 검사 기술의 정확도가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검진 참여율이다. 여러 국가에서 정기검진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지만, 실제로 검사를 받는 여성의 비율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생리혈 기반 검사의 가장 큰 강점은 접근 방식에 있다. 이 방식은 여성들이 사용하는 생리대를 통해 자연스럽게 검사에 필요한 검체를 확보할 수 있다. 더욱 긍정적인 점은 생리혈을 이용한 HPV 검사는 기존 검사와 비교했을 때 매우 유사한 수준의 정확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들은 생리 기간에 특수한 장치가 달린 생리대를 사용했다. 이 작은 장치에 생리혈이 자연스럽게 모여 HPV DNA 검사를 위한 시료로 활용됐다. 같은 참가자들에게 기존 방식의 자궁경부 세포 검사도 의료진이 직접 시행했다. 기존 방식의 검사와 새로운 방식의 검사를 동시에 진행해 두 가지 검사의 성능을 직접 비교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생리혈을 이용한 비침습적 진단 접근법이 실제 의료 현장 적용을 검토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병원이 아닌 일상에서 시작되는 진단

이 기술은 가까운 미래에 실제 의료 시스템에 적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기술이 도입된다면 자궁경부암 검진 절차는 지금의 방식과 매우 달라질 수 있다.

검진을 원하는 여성들은 생리 기간에 맞춰 검진용 특별 생리대를 착용하면 된다. 생리대에 있는 전용 수집 장치를 사용해 검체를 확보하고, 이를 검진기관으로 보내면 된다. 이후 검사 결과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제공된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의료 상담이나 추가 검진이 이뤄질 수 있다. 이 모델은 병원을 방문하지 않고도 검진이 가능해지면서, 더 많은 여성이 검사에 참여하고 질병 예방 효과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기술을 실제 의료 현장에 도입하기 위해서는 추가로 보완해야 하는 요소도 존재한다. 생리혈을 활용한 검사는 폐경 이후 여성의 경우 적용이 제한된다. 그리고 표준화된 시료 수집 방식과 검사 방법을 확립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다양한 인종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재현되는지에 대한 포괄적인 검증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이 방법이 새로운 진단 가능성을 보여준 의미 있는 출발점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김정호 서강대 생명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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