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개척한 작은거인 故 서명숙...하늘 올레로 떠난 ‘길 위의 별’

제주의 거친 바람도 오늘만큼은 가쁜 숨을 고르며 고요히 길을 내어주었다.
속도에 쫓겨 길 잃은 우리에게 '놀멍, 쉬멍, 걸으멍'의 철학으로 스스로를 안아줄 틈을 내어주었던 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이 수많은 이들의 눈물 어린 배웅 속에서 하늘 올레로 긴 여정을 떠났다.
제주를 넘어 대한민국에 '걷기 열풍'을 일으키며 여행의 패러다임을 바꾼 고(故) 서명숙 이사장의 영결식이 10일 오전 9시 제주올레 6코스로 이어지는 서귀포시 서복전시관에서 엄수됐다.


서명숙 이사장은 대한민국 걷기 여행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선구자로 꼽힌다. 서귀포시에서 태어나 서귀포초, 서귀여중, 신성여고를 거쳐 고려대를 졸업한 고인은 월간 '마당' 기자를 시작으로 시사저널 정치팀장과 취재 1부장을 지냈다.
특히 우리나라 언론 사상 최초로 여성 편집장을 역임하고 2005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맡는 등 치열한 언론인의 삶을 살았다.
이후 찾아온 번아웃으로 펜을 내려놓은 그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고향 제주에도 산티아고 길처럼 사람이 대접받으며 걷는 길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돌아와 지인들과 함께 '서귀포 걷는 길'을 냈고, 그 결실로 2007년 9월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초등학교에서 광치기 해변까지 이어지는 올레 1코스가 탄생했다.
고인은 2009년 12월까지 2년 3개월 만에 15개 코스를 만들었고, 마침내 27개 코스, 총 길이 437km에 이르는 제주올레를 완성했다.
길을 걷는 사람, 길 위에 사는 사람, 길을 내준 자연 모두가 행복한 '놀멍, 쉬멍, 걸으멍'의 철학은 개발 중심이던 한국의 관광 문화를 사유하고 성찰하는 생태 여행으로 완전히 바꿔놓았다.


고인의 발걸음은 굵직한 의미를 남겼지만, 곁에 남은 이들의 가슴속에는 거창한 업적보다 지극히 소탈하고 따뜻했던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가 더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결식 제단 앞에 차례로 선 사람들은 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꾼 '개척자 서명숙'의 거대한 족적을 기리는 것을 넘어, 일상에서 살을 부대끼며 나누었던 소소하고 세세한 추억 속 '사람 서명숙'을 애틋하게 회고했다.
안은주 제주올레 대표는 조사를 통해 "서명숙 이사장은 속도 경쟁을 하며 질주하는 우리에게 오감을 열고 느리게 걷는 '놀멍, 쉬멍, 걸으멍' 간세다리가 되라고 제주 올레길을 열어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19년 동안 길을 내고 이어온 그녀의 몸은 우리 곁을 떠나지만, 서명숙의 길과 정신은 모두에게 남아 있다. 남은 우리가 하늘 올레를 내고 계실 이사장님을 하늘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열어주신 길을 더 탄탄하게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해외와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뭉클한 추도사도 이어졌다. 추성신 아시아 트레일즈 네트워크 대표는 생전 고인이 집필한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저서가 대만에서 공식 출판된다는 소식을 전하며 "고인의 따스함과 지혜로움이 대지의 사랑과 평화의 길에 대한 꿈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추모했다.
평생의 동지였던 유시춘 EBS 이사장은 "명숙아, 너는 결코 제주를 떠나지도 세상을 떠나지도 않았다. 오늘처럼 꽃이 많이 핀 날, 꽃향기 속에, 나풀거리는 동박새로 영원히 살아있을거야. 우린 너와 결코 작별하지 않는다"라며 애통한 마음을 쏟아냈다.
생전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배우 류승룡씨는 "고인은 어미 새처럼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공감이 되어주셨다"며 "고인의 마음, 목소리, 웃는 모습이 올레 곳곳에 표식이 되어 우릴 안내할 것이다. 긴 밤, 긴 날들을 불면과 고민으로 내신 그 길을 헛되지 않게 남은 우리들이 서로 응원하고 보듬으며 채워 나가겠다"고 추모했다.
배우 문소리씨도 고인과 함께 숲길과 계곡을 걸었던 추억을 회상하며 "저를 위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길들을 선물해 주셨던 선생님이, 앞으로 길 위에서 바람이 불고 햇빛이 화사할 때마다 곁에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겠다"며 눈물을 뚝뚝 떨궜다.

제주올레 길 연 사람 서명숙, 그대 떠나는 길에
허영선
부탁입니다
이제, 제주올레 떠나는,
길을 연 사람의 부탁입니다
조금 먼저 하늘올레 가는 길입니다
눈부신 꽃비 흘어지며 길을 내주는 날에
저는 지금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길에서 바람으로 햇볕으로 파도로 출렁이며
당신들의 길 위에 함께 합니다
이번 생은 우리들의 길을 만나서,
걸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시흥에서 시작하여 종달리 해안까지 걷다보면
제주땅 곳곳이 다시 일어나라
일어나라 하였습니다
누구나
생의 길에서 태어나고 길을 떠납니다
이제 저절로 길이 된 사람의 부탁입니다
나는 길을 만들어낸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나의 길 위에서 우리들의 길을 열었을 뿐입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만나도록
안보이는 섬의 얼굴이 보이도록,
안보이는 환호가 보이도록
이 길을 열었을 뿐입니다
걷다보면 그저 스스로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슬픔을 등지고 아픔을 등지고 걸어보세요
조금만 힘을 내고 걷다보면
봄날처럼 환한 얼굴로 기다리는 길들이
위로의 어깨가 되고 미소를 지을 겁니다
이 길 위에 선 당신에게 부탁입니다
힘들면 걸음을 조금만 천천히 해 주세요
풍경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이 느리지만 따라올 수 있도록
제주바람은 먼저 가고 앞서가는 사람보다
놀멍 쉬멍 걷는 사람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건넵니다
더 깊고 깊은 위로를 건넵니다
지나온 길을 자꾸 돌아보지 마세요
다만, 스치고 지나치는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 그것만은 잊지 말아 주세요
올레길을 걷는 이여
이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또 사랑해주세요
걷다가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잠시 서로서로 눈을 맞춰 주세요
길은 홀로 걷는 것이지만
삶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으니까요
힘이 들면 걷다가 잠시 숨을 내쉬고 그냥 멈추십시오
그건 내 마음의 나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한 가지 더,
이 길을 당신의 것처럼 아껴 주세요
돌 하나, 풀 한 포기,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그리고 이 길을 조금 먼저 걸어본 올레길
연 사람의 당부입니다
그저 올레길은 행복하여야 해요
시리고 설운 맘도 뚜벅뚜벅 걷다보면
고요하고 깊게 깊게 닻을 내린답니다
걷는 것은 기쁜 순간은 더 기쁘게 하고
슬픈 순간은 거기서 벗어나게 하는 것
올레길을 걸어보세요
길은 행복한 종합병원 맞습니다
흐리면 흐린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마음이 깊어질수록 길 위의
별빛이 이 길 저 길 어디에서든
반짝일 겁니다 그러면 눈 맞춰주세요
아프고 저린 삶의 뼈도 길은 기억합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어디든 길이 있고, 죽지 않으니 그것은 길의 유언입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길은 누구의 것도 아니니
이렇게 전부 그대로 두고 갈 수 있다니 행복합니다
충분히 걸었습니다
충분히 사랑하였습니다
충분히 웃었습니다
걷는 길 위 아주 작고 낮은 풀잎이거나
빛이거나 바람으로 언제나 자유하는 사람,
제주 올레길 처음 낸 사람, 서명숙입니다
마지막으로 유가족을 대표해 나선 고인의 장남은 슬픔에 잠긴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답사를 전했다.
그는 "어머니가 사랑했던 제주의 자연과 길, 그 위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을 저희가 깊이 기억하겠다"며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을 여러분과 길 위에 맡기고, 어머니 서명숙을 저희 가슴에 모시고 가겠다"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