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2.0] “연합국에 항복해도 조선은 일본 땅” 日帝 최후의 요구에 미국은 흔들렸다

조선일보 8일 자 A28면의 ‘제대로 쓰는 해방 전후사’에서 문유미 스탠퍼드대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한반도 점령에 관한 미국의 정치적 의도가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1945년 5월 23일 자 삼부조정위 문서와 그 첨부 자료(SWNCC 87/1/D)다. …38선 획정 문제를 깊이 연구한 김기조 교수에 따르면, 이 문서가 작성될 즈음 일본은 중국과의 평화 협상을 추진하면서, 후버 전 대통령을 통해 조선과 대만의 보유를 전제로 한 ‘조건부 항복’을 미국과 교섭 중이었다고 한다. 미국이 카이로 공약을 지킨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길까? 일본이 전쟁에서 지더라도 조선과 대만만큼은 계속 ‘식민지’로 보유하려 하고 있었다고?
지금은 절판돼 중고서점에서 정가(3만원)의 4배 넘게 호가되고 있는 김기조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의 2006년 연구서 ‘한반도 38선 분할의 역사’(제2증보판·한국학술정보)에서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1943년 12월 1일 미·영·중의 3거두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장제스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일본군은 그들이 탈취한 모든 영토에서 축출돼야 하며, 그의 주권을 일본 본토 4개 섬 안으로 한정하고, 한반도는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 독립시켜야 한다’고 공약했다. 이 어구의 배후에는 전후에 연합국들이 한반도를 신탁통치하려는 복안이 숨겨져 있었다.
그런데 카이로 선언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어땠는가? 당시 일본 외상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는 이렇게 비판했다. 21세기의 한국인이 읽어 보면 실로 가슴 철렁할 내용이다.
“그(카이로) 선언 중에는 일본 영토의 일부를 반환할 것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일본의 강화 노력에 장애가 될 것이며, 국제적으로 인정된 청일전쟁에서 얻은 조선 등 영토의 일부를 반환하라는 것은 역사적 기정사실을 변경해 일본을 침략 전쟁으로 몰고 있는 것으로서 일본의 국민 감정상 용납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일본의 평화 노력에 대단히 장애가 됐다.”

‘일본의 평화 노력’이라는 대목에서 코웃음이 터질 지경이지만, 이것은 ‘청나라의 영토였던 조선이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일본 영토가 됐다’는, 불과 몇십 년 전의 역사적 사실과도 어긋난 역사 인식이다. 워낙 다급해서 책을 펼쳐볼 시간도 없었던 것인가?
그런데 김기조 교수는 ‘일본이 이때부터 조선과 대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갖은 방법을 써서 극비리에 종전 공작을 모색했다’고 했다. 미군이 남태평양에서 전세를 역전하기 시작한 1943년 봄부터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전 수상을 중심으로 한 그룹이 ‘이쓰유카이(乙酉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들은 “일본이 모든 해외 영토를 상실하더라도 식량과 자원의 보급원인 조선과 대만을 (계속) 영유하는 경우에만 항복할 수 있다”는 지론을 내세우고 종전 운동을 추진한다는 중론을 세우고 있었다.

이것은 일제의 공식 방침이 된다. 종전이 임박해진 1945년 5월 15일, 해군성의 다카키 소기치(高木㹅吉) 소장은 요나이 미쓰마사(米內光政) 장관에게 제출한 종전 방안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일본의 식량 사정뿐만 아니라 극동의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조선과 대만은 극력 아국의 세력권에 남아 있도록 주장할 것. …조선과 대만은 일본 측의 국제법규상 조약에 의해 영토권을 획득한 것으로서 만주·중국 및 기타 무력 점령 지역과는 달라, 전승국이 함부로 영토권을 일본 정부의 동의 없이 탈환하거나 영토권을 이동할 수 없음.”
‘극동의 혼란 예방’ ‘국제법규상 조약’이라….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대(對)식민지 인식의 실체였다.
이후 일본은 은밀하면서도 전방위적인 ‘종전 공작’에 나섰다. 나중엔 “대만은 내주더라도 조선은 절대 양보 못 한다”는 고집까지 부렸다. (1)대 중국 화평공작 (2)스웨덴을 통한 화평공작 (3)바티칸을 통한 화평공작 (4)스위스를 통한 화평공작 (5)리스본(포르투갈)을 통한 화평공작 (6)소련을 중재로 한 화평교섭이 동시에 추진됐다. 그 주 목적은 ‘이대로 연합국이 원하는 대로 항복을 한다면 조선을 빼앗기게 된다’는 위기 의식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다른 곳은 몰라도 조선만은 절대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기조 교수의 책 274쪽에서는 이것을 도표로 이렇게 정리해 놓았다.

그럼 미국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카이로 선언을 절대 뒤집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나?
아니다. 조금은 흔들렸다. 우리에겐 가장 신경이 곤두서는 대목이다.
미국 합동참모부(JIS)의 극동전문반은 1945년 3월 13일 건의서에서 ‘일본군이 모든 점령 지역으로부터 철수하되, 조선·대만·류큐 등에선 예외적으로 잔류시켜 적절한 경찰력으로 명목상 일본의 관리를 계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합동참모본부(JCS)는 5월 9일 전쟁·해군 양 장관에게 제출할 각서의 초안에서 ‘일본이 조기에 무조건 항복을 수락하도록 할 방법’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연합국이 일본 본토를 점령하지 않을 것과 일본이 조선과 쿠릴 열도를 계속 영유하게(to retain Korea and the Kuriles) 한다는 조건하에는, 일본이 몇 개월 내에 종전을 제의해 올 것임.” 김기조 교수는 ‘이것은 일본 측의 집요한 막후 비밀 공작의 효과로 나타난 결과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여기 또 한 명 일본 측의 입장을 대변한 미국 정치인이 있었다. 허버트 후버 미국 전 대통령이었다. 5월 28일 후버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면담하고 ‘일본 정부 형태를 파괴하지 않을 것과 조선·대만의 일본 잔류’를 건의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주 다행히도 이 안은 실무진에서 제동이 걸렸다. 6월 1일,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은 트루먼 대통령에게서 전달받은 후버의 종전안을 참모들에게 하달해 논평하도록 했다. 조지 링컨 전략정책단장은 6월 14일의 각서에서 “카이로 공약과 중·소의 군사적 이유 때문에 일본에 의한 조선과 대만의 계속 영유는 수락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 링컨이야말로 우리에게는 에이브러햄 링컨보다 훨씬 더 고마운 링컨이었을 것이지만, 얄궂게도 8월 중순 한반도의 38선 분할을 주도한 인물도 바로 그였다.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은 링컨의 의견에 전폭적인 동의를 표명하며 그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스팀슨 장관에게 제출했다.

스팀슨 장관은 이 의견을 포츠담 선언까지 밀어붙였다. 7월 1일 초안된 포츠담 선언문에는 8항에 “카이로 선언의 제항은 시행돼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규슈·시고쿠 및 우리가 결정하는 인접 소도시로 국한된다”고 밝혔다. 사실 바로 여기야말로 우리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쳐야 하는 시점이었다.
도대체 일본은 왜 그렇게 최후까지 한반도의 지배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을까? 김기조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일본이 패망하던 8월 15일 일본 지나군파견군 총사령관인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는 육군상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최후 호소 전보문에서 이렇게 썼다. “일본의 영토를 본토로만 국한한다면 일본 인구가 3000만명이었을 때로 되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구가 7000만명이니 반드시 조선과 대만을 소유해야 우리가 생존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그만큼 한반도가 긴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한반도를 내놓지 않으려는 일본의 욕심은 대단히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는 한반도를 잃지 않기 위해, 종전에 임해 화평공작이라는 막후 음모를 통해 조선을 계속 영유하려고 항복을 연기하다가, 원자탄의 세례와 소련군의 참전을 자초해 패망하게 됐던 것이다. 일본의 많은 서책과 논문들, 특히 보수 계열은 더더욱, 조선을 계속 영유하려다가 원폭을 맞고 항복했다는 것이 수치스러워서인지, 천황제의 보존만을 위해 항복을 지연시킨 것으로 부각시키거나 강조하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일본 관변 측은 물론 학계에서도 이러한 내용들은 가급적 노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농후함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만약 카이로 선언을 고수해야 한다는 링컨 같은 실무진의 판단이 없었더라면, 이승만이 루스벨트를 설득하고 김구가 장제스를 설득하는 등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외교적 노력이 없었더라면, 더 나아가 우리가 일본의 통치에 순응하고 독립운동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했더라도 한반도는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패전국의 식민지’라는 희한한 지역이 됐을 것이라는 의미다. 상상만으로도 괴롭고 끔찍한 일이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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