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FLNG 외길’…블랙록이 콕 찍은 삼성중공업

안옥희 2026. 4. 1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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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포커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사진=삼성중공업

‘조선업 피크아웃이 지났다’는 시장의 의심을 뚫고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와 글로벌 투자은행이 K조선에 수조원을 집어넣었다. 블랙록은 삼성중공업 지분 5%를 확보했고 표면이자율 0% 조건의 HD현대중공업 교환사채에는 글로벌 기관 주문이 쏟아졌다.

HD현대가 엔진 수직계열화에, 한화오션이 지배구조 재편에 에너지를 분산하는 사이 삼성중공업은 단 두 가지만 팠다. 표준화 건조와 FLNG(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생산설비). 과거 조 단위 적자를 낸 실패의 야드가 지금은 글로벌 자본이 가장 선호하는 ‘수익 기계’로 재평가받고 있다.

 블랙록, 왜 하필 지금 5%를 넘겼나

지난 4월 2일 장 시작과 동시에 삼성중공업 주가는 전일 대비 5.19% 오른 2만8400원으로 출발했다. 블랙록이 지분 5.01% 취득 공시를 낸 직후였다. 시장의 관심은 ‘얼마’가 아니라 ‘언제’에 쏠렸다.

조선업 피크아웃 논란이 한창인 국면에 블랙록이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가 신호다. 운용자산(AUM) 14조 달러를 돌파한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가 국내 조선 업종에서 주요주주로 올라선 것은 업황 전환에 대한 확신 없이는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라는 평가다.

블랙록은 이미 삼성전자(5.07%), 삼성SDI(5.01%), 삼성E&A(5%) 등 국내 핵심 우량주에서도 5%대 지분을 보유해왔다. 조선업 진입은 그 라인업에 새로운 업종을 추가한 것이다.

K조선 전체를 향한 글로벌 자본의 행보는 삼성중공업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HD한국조선해양은 HD현대중공업 보통주를 기초자산으로 한 15억5000만 달러(약 2조4000억원) 규모 교환사채(EB)를 발행했는데 표면이자율 0%, 만기 2031년이라는 조건에도 JP모간·UBS·HSBC가 공동 주관한 이 딜에 글로벌 기관 주문이 몰렸다. 국내 조선사 발행 EB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다.

조선업 슈퍼사이클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의 확신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 딜이라는 평가다. 블랙록의 베팅 시점은 실적 흐름과 겹친다.

삼성중공업은 2025년 매출 10조6500억원을 기록하며 9년 만에 연매출 10조원을 회복했고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72% 증가한 8622억원을 올렸다. 실적 가시성은 자본을 유인하는 핵심 동력이다.

연간 영업이익이 1년 만에 두 배 가까이 폭증할 것이라는 증권가의 낙관적 가이던스가 블랙록의 ‘머니무브’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조선 빅3 1분기 실적 전망. 삼성중공업이 액화천연가스 생산·저장·하역설비(FLNG) 상부구조물을 건조하는 모습. 사진=삼성중공업·그래픽=송영 기자

 ‘붕어빵 건조’가 돈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슬롯 회전율이다. 선주별 맞춤 설계 대신 고도로 표준화된 도면으로 도크를 돌린다. 반복 건조를 통해 설계 비용을 절감하고 공정 숙련도를 높여 이익률을 쥐어짜는 구조다.

이재혁 LS증권 애널리스트는 “3분기 이후 건조 프로덕트 믹스 개선이 본격화되며 가파른 이익률 성장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며 “제1·2 드라이독 재가동을 통한 생산능력 확대 포석도 깔렸다”고 분석했다.

경쟁 구도를 보면 선택의 이유가 명확해진다. HD현대중공업은 엔진 제작까지 내재화한 압도적 수직계열화 체계를 갖췄으나 거대한 조직 규모 탓에 선종 교체나 선주 요구에 대응하는 슬롯 유연성은 상대적으로 경직돼 있다는 평가다. 한화오션은 미국 조선소 운영과 특수선 역량 내재화 등 방산 밸류체인 구축에 전사적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경쟁사들이 수직계열화와 지배구조 개편 등 내부 현안에 매몰된 사이 ‘상선 표준화’라는 외길을 택했다. 신조선가 상승기에 빠른 자본 회수를 원하는 선주들에게 삼성의 납기 속도는 가격 이상의 가치다.

1월 16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열린 ‘코랄 노르트’ FLNG 진수식. 사진=삼성중공업

 실패라는 자산이 만든 FLNG 독주 체제

삼성중공업이 해양플랜트에서 갖는 지위는 역설에서 출발한다. 2010년대 중후반 셸(Shell)의 프렐류드(Prelude) FLNG 등 초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했다가 설계 변경과 공기 지연으로 조 단위 적자를 냈다. 2023년 연간 흑자전환 이전까지 그 시절 손실이 꼬리표로 따라붙었다.

이후 HD현대와 한화오션이 방산 수주에 공을 들이며 군함 건조 역량을 유지한 것과 달리 삼성중공업은 군함 사업을 접었다. 야드를 비웠고 그 자원을 FLNG에 몰아넣었다. 선택과 집중의 결과는 시장 독주로 돌아왔다.

삼성중공업은 2010년대 이후 전 세계에서 발주된 FLNG 10기 중 6기를 수주한 트랙레코드를 보유하고 있다. ‘코랄 노르트(Coral Norte)’ 등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근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판도 변화도 삼성중공업에 긍정적이다. 과거 가스전 개발은 육상에 거대 플랜트를 짓는 방식이었으나 이제는 ‘바다 위에서 바로 뽑아 배에 싣는’ FLNG가 대세다. 땅 위 플랜트는 지정학적 리스크나 환경 규제, 막대한 건설 비용에 노출되지만 FLNG는 언제든 이동이 가능하고 공기도 짧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파이프라인(PNG)에 의존하던 가스 공급망이 붕괴하면서 글로벌 오일 메이저들은 ‘움직이는 가스 기지’인 FLNG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현재 미국 델핀 미드스트림이 추진하는 총 12조원(3~4기) 규모의 프로젝트 수주를 목전에 둔 배경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낙찰의향서(LOA)를 거쳐 올해 최종 계약이 유력시되는데 공기를 2년 가까이 단축한 삼성의 ‘표준 설계’ 능력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마리오 아자르 블랙앤비치 CEO는 최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를 방문한 직후 SNS를 통해 FLNG 프로젝트의 순항 소식을 타전했다.

두 회사는 세계 최대 규모인 셸의 프렐류드 FLNG를 시작으로 모잠비크 코랄 술, 캐나다 시더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엔지니어링(BV)-건조(삼성)’로 이어지는 전략적 단일팀으로서 시장의 기술 표준을 정립해왔다.

아자르 CEO는 “글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팀의 열정이 세계 최고의 FLNG 사업을 구축하고 있다”며 삼성의 건조 역량을 치켜세웠다. 엔지니어링 설계와 표준화 공법의 결합은 단순한 건조를 넘어 ‘바다 위 가스 공장’의 실효성을 입증하는 과정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삼성중공업 판교R&D 센터. 사진=삼성중공업

 군수지원함 도전…‘삼성’이라는 이름의 무게

MASGA(한·미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 훈풍을 타고 진출한 군수지원함 사업은 새로운 성장 방정식이다. 미 해군 차세대 군수지원함(NGLS) 개념 설계 참여는 213조원 규모의 한·미 조선 협력이 낳은 첫 실질적 성과다.

NGLS는 미 해군 ‘분산 해양작전’의 핵심 전력으로 향후 13척 이상의 발주가 예고된 사업이다. 군함 사업을 접고 FLNG에 올인했던 삼성의 전략 공식에 ‘미국발 방산 수요’라는 새로운 성장 축이 더해지는 것이다.

삼성 포트폴리오 내에서 조선업은 이질적이다. 석유화학과 방산을 한화에 매각한 뒤 홀로 남겨진 중후장대 산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질성은 글로벌 선주들 사이에서 결국 재무 신뢰로 이어진다. ‘절대 망하지 않을 기업’이라는 인식이 공정 관리 시스템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이서연 상상인증권 애널리스트는 “쇄빙 셔틀탱커 등 고난도 선종에서 검증된 레퍼런스는 독보적 진입장벽”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업 분석의 기준이 수주잔고에서 자본 효율성으로 옮겨온 흐름은 삼성중공업에 유리하다. IB 업계에서 삼성중공업을 ‘퓨어 플레이(Pure Play) 조선주’로 분류하기 시작한 배경이다.

결국 관건은 해양플랜트 특유의 실행 리스크 관리다. 블랙록의 베팅이 성공한 투자로 기록될지는 초대형 프로젝트의 공기 준수 여부에 달려 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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