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은 살아있다] 근심 푸는 집 ‘화장실’의 품격…해우재
故 심재덕 전 수원시장 남다른 철학
살던 집 허물고 변기 모양 집 만들어
숨길 곳 아닌 열린 소통과 사색 공간
마당 곳곳 변기·똥 모양 조형물 눈길
최초 공중화장실 ‘백제 왕궁리’ 재현
문화센터까지 둘러보면 마음이 차분


박물관은 낡은 건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자리한 지역의 역사·문화·사회를 아우르며 강물처럼 끊임없이 이야기가 흐르는 현장이다. 지난해 650만명이 찾은 국립중앙박물관처럼 휘황찬란한 박물관만 있으랴. 이색적인 주제를 삼고 아기자기한 소품을 전시해놓은 숨은 명소도 방방곡곡 많다. 새 연재 ‘박물관은 살아있다’는 기자가 발품을 팔아 명물이 된 박물관을 직접 방문해보고 그곳의 색다른 매력과 서사를 찾아나서는 견문록이다.
“화장실을 보면 그 나라의 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공중화장실은 한 나라의 공중보건 상태와 민도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공중화장실 문만 열어도 특유의 암모니아향이 훅 밀려오던 옛 시절을 기억한다면, 작금의 변화가 얼마나 놀라운지 실감한다.
국내 ‘선진 화장실 문화’를 앞장서 이끈 인물이 있다. 깨끗한 화장실이 도시의 품격이라고 믿은 고(故) 심재덕 전 경기 수원시장이다. 그의 신념은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둔 수원의 공중화장실 개선사업에서부터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음악이 흐르고 향기가 나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공중화장실을 구현해내며 도시의 새 표상을 세우는 데 힘썼다.
앞서 심재덕 전 시장은 1999년 한국화장실협회를 세웠고, 이후 세계화장실협회(WTA)를 창립해 화장실 문제를 세계 의제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의 신념은 결국 한채의 집으로까지 이어졌다. 2007년, 그는 WTA 창설을 기념해 30여년간 살던 집을 허물고 그 터에 변기 모양의 집 ‘해우재(解憂齋)’를 세웠다. ‘근심을 푸는 집’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해우재의 구조를 톺아보면 그의 철학이 명징하게 드러난다. 대부분 집은 거실을 중심에 두지만 그는 화장실을 집 한가운데 놓았다. 그에게 화장실은 숨길 곳이 아니라 가운데 두고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지금의 해우재는 심 전 시장이 2009년 별세한 뒤 유족이 시에 건물을 기증하면서 화장실 문화 전시관으로 변모했다. 1층에는 화장실의 역사와 과학을 알려주는 전시관이, 2층에는 특별전이 열리거나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들어섰다.

해우재를 둘러본 뒤 문을 나서면 마당 곳곳에 변기 모양 화분과 똥 모양 조형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중 건물 앞 거대한 똥 조형물은 인기 있는 사진 촬영 장소다. 관람객은 이 옆에서 엉덩이를 살짝 내밀고 대변을 보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누군가의 잘난 척을 비꼴 때 쓰던 “니 똥 굵다!”는 말도 이 앞에서는 타인을 공격하는 욕설이 아니라 유쾌한 농담이 된다.
마당을 따라 걸으면 바로 옆 화장실문화공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똥을 소재로 한 조형물에 더해 호자(남성의 소변용 요강) 같은 전통 화장실 문화를 형상화한 설치물이 곳곳에 있어 산책하듯 둘러보기 좋다. 피식 웃음이 나지만, 그 설치물을 감상하며 ‘화장실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다’는 점을 곱씹게 된다.

해우재의 홍보와 교육을 담당하는 이정아 에듀케이터는 야외 공원에서 꼭 들러야 할 곳으로 백제 시대 왕궁리 화장실을 재현한 조형물을 꼽는다. 백제 30대 무왕 때 조성한 왕궁리 화장실은 한국 최초의 대형 공중화장실로 알려져 있다.
이 에듀케이터는 “왕궁리 화장실터에서 민물고기 기생충이 발견되면서 당시 사람들이 민물생선을 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며 “인분은 선조의 식습관과 생활사까지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으니 바로 재래식 화장실에 쪼그려 앉은 아이의 항문에서 쏟아져나온 황금색 똥 조형물이다. 다소 노골적인 형상에 처음에는 시선을 둘 곳이 난감하지만, 곧 방문객의 손길에 반들반들해진 황금빛 똥이 눈에 들어온다. 똥꿈은 길몽이라 하고, 길 가다 새똥을 맞으면 운수가 좋다는 속설이 있지 않은가. 방문객은 행운을 빌며 이 황금똥을 한번씩 쓰다듬고 간단다. 선거를 앞두고 이걸 만진 후에 선출직 공무원에 당선됐다는 일화도 있으니 믿거나 말거나.

해우재와 야외 공원을 둘러본 뒤에는 해우재문화센터로 향하면 좋다. 1층 도서관에서 똥을 주제로 한 책을 읽고, 2층 어린이 체험관에서 즐겁게 배변활동 과정을 배울 수 있다. 4층 옥상 전망대에 오르면 변기 모양의 해우재와 화장실문화공원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위에서 조망한 해우재는 단순한 집이 아니라, 단정한 화장실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한 사람의 웅숭깊은 뜻을 품은 상징처럼 여겨진다.
해우재를 떠나기 전, 일부러 문화센터 1층에 자리 잡은 공중화장실에 들렀다. 해우재의 화장실답게 정갈한 분위기에 은은한 향기까지 난다. 마치 작은 호텔 로비 같다. 해우재를 떠나며 화장실은 우리 정신을 가다듬는 사유의 공간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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