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작은 말을 조그맣게 전하고파…자세히 보니 예쁘대요라고"
편집자주
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작가의 책장이요? 작가에게는 책장이 없어요. 작가가 책장에 갇히는 순간 끝이야. '채근담'을 보면 이런 글귀가 나와요. '세상 사람들이 고작 유자서(有字書)나 읽을 줄 알지 무자서(無字書)는 읽을 줄 모른다.' 책에 없는 걸 읽으려고 노력해야 돼. 인생, 자연, 사랑…. 이 속에 시가 있어요."
지난 3일 충남 공주시 봉황산 자락에 자리한 나태주풀꽃문학관. 뜨락을 거니는 나태주(81) 시인의 뒤를 좇았다. "여기 생강나무꽃이 뽀지직뽀지직 핀다. 올해는 시원치 않네. 그러니까 내년에는 좋아질 거야." 막 올라온 꽃눈 앞에서 시인이 걸음을 멈췄다 다시 뗀다. "얘도 꽃대 나왔다. 아이고, 좋아 죽겠네."
그가 말한 무자서의 풍경이 여기 있었다. 명색이 풀꽃문학관인 만큼 이곳에선 잡초도 함부로 뽑지 않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전 국민이 외다시피 하는 그의 대표시 제목은 '풀꽃'. 덕분에 그의 이름 앞에는 '풀꽃 시인'이란 수식이 붙는다. 2015년 출간한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100만 부 넘게 팔렸다. "나태주 시는 장미꽃, 비싼 꽃이 아니에요. 민들레꽃같이 생겼어. 민들레 씨앗처럼 많이, 작고, 가볍게, 그리고 멀리 보내지." 노시인이 풀꽃처럼 웃었다.

"55번째 시집 준비 중…시가 날 찾아와"
1971년 등단한 그는 첫 시집 '대숲 아래서'(1973)를 시작으로 54권의 창작 시집을 펴냈다. 산문집, 동화집, 시화집 등까지 더하면 200권이 넘는다. 올해 초에는 '돌아보니 그곳이 천국이었네'를 선보였다. 6년간 후원해온 소녀 네마 니코데무를 만나기 위해 동아프리카 탄자니아로 떠난 여정에서 써내려간 신작 시 134편과 직접 그린 연필화 62점을 수록한 여행시집이다.
그는 55번째 시집을 준비 중이다. 인터뷰 하루 전, 휴대폰에 써 내려간 따끈따끈한 신작도 이날 공개했다. "박수소리 그치지 않을 때/ 떠났어야 하는데// 텅 빈 극장 안/ 빈 무대 위에서/ 박수소리 기다리며 서 있는// 그대, 늙은 배우처럼" 제목은 '늙은 시인'. 팔순을 넘기고도 그치지 않는 그의 시는 어디에서 비롯될까. 나 시인은 "아직도 내 안에 결핍이 남아 있는가 보다"며 "그리움, 기다림, 사랑 다 결핍에서 나온다"고 했다. 시가 그를 찾아오는 경지다. "처음에는 시를 만들어요. 시를 모방해요. 억지로 씁니다. 괴롭죠. 그러다 나중에는 시가 찾아옵니다. 매우 반갑죠. 기뻐요."

"내가 죽게 생겨서, 살려고 시를 썼다"
충남 서천에서 태어난 나 시인은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2007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기까지 43년간 교직에 몸담았다. '시골 시인'임을 평생 자랑으로 삼았다. 그는 "나는 독학자였다"며 "오직 책만이 스승이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에서 전학 온 친구 강명구에게 빌려 읽은 강소천 동화집 '진달래와 철쭉'(1953)은 그의 '인생 첫 책'이다. 친구 이름까지 기억할 만큼 생생하다. "전쟁 직후라 책이 얼마나 귀했는지 몰라. 일주일만 읽겠다고 가져와서 이주일을 읽었어. 외울 정도로 읽고 싶어서." 책의 세계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를 놓아준 작품이었다.
시를 만난 건 훨씬 나중이다. 중학교 2학년 때 하숙방 룸메이트가 시 한 편을 보여줬다. 박목월의 '산이 날 에워싸고'였다. "읽는 순간 가슴이 콱 막혔어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어요. 나도 몰라요." 습작 시의 시작은 연애편지였다. 초등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학교에 다니던 시절 한 여학생을 좋아하게 되면서다. "좋아하는 마음이 꽉 찼는데 그대로 두면 안 되겠고, 도대체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시를 썼어요." 그는 "내가 죽게 생겨서, 살려고 시를 썼다"고 했다.
사범학교 3년 동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시 공부에만 몰두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게걸스럽게 시집을 읽었다. 박목월 시집 '보랏빛 소묘',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시를 엮은 '청록집', 신석정 시집 '촛불' '슬픈 목가', 1950년대 한국 시단을 이끈 시 선집인 '한국전후문제시집' 등이 그의 교과서가 됐다. 그는 "일찍이 청록파나 신석정 선생의 시를 읽으며 내 시가 출발했다"며 "뒤늦게 접한 해금 시인 정지용 김기림 백석 이용악 오장환의 시를 더불어 읽었더라면 아마 내 시의 뼈대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20년 시 공부 다시 해서 쓴 '풀꽃'
40대에 접어들어 시 공부를 다시 했다. "내 시가 망가져 있더라고." 그때 탐독한 게 당시(唐詩), 하이쿠, 시조다. 두보 이백 왕유 등 중국 당나라 때 대가들이 쓴 시와 세계에서 가장 짧은 정형시인 하이쿠를 다룬 '일본인의 시정'을 읽었다. 나 시인은 "대오각성을 했다"며 "시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게 아니라 요점만 따끔따끔 아프게 써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하이쿠에서 짧게 후려치는 단호함을, 시조에서는 한국어의 말법을 익혔다.
그렇게 절치부심해 쓴 시가 2002년 발표한 '풀꽃'이다. '풀꽃'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2년, 광화문 글판에 오르면서. 그는 "당시, 하이쿠, 시조에서 배운 것을 내 시에 담아내기 위해 애썼다"며 "40대에 시를 다시 공부하고 연마한 끝에 60대에 가까워 결실을 맺었고, 대중에 시를 알린 것도 70대에 이르러서였다"고 했다. 그야말로 들풀 같은 생명력이다.

그의 따뜻한 한마디에서 수많은 독자가 안식을 찾듯 그 역시 책에서 위안을 구한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서전 '희망'을 인상 깊게 읽었다는 시인은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의 말을 누군가 문장으로 옮긴 책들 가운데 의외로 좋은 책이 많다"고 귀띔했다. 불경과 성경, '논어'가 그렇다. 불경 대부분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뜻의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해 부처의 말을 전하듯이. "부처님, 예수님, 공자님의 큰 말씀은 여시아문하고, 나는 시인이니까 작은 말을 조그맣게 전하고 싶어. 나는 자세히 보니까 예쁘대요, 오래 보니까 사랑스럽대요, 하고."
공주=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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