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선언했던 거장은 왜 다시 연필을 들었나

백수진 기자 2026. 4. 10.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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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다큐 15일 개봉

“내 머리가 고장 난 것 같다.”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만들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극심한 자기 의심과 불안에 사로잡힌다. 스튜디오 지브리 역사상 최장 기간, 최대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체력은 예전 같지 않았고, 불면에 시달리며 한 컷도 그리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왜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다시 고통스러운 책상 앞으로 돌아왔을까.

다큐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NHK

2024년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 수상작 ‘그대들은…’의 제작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15일 개봉한다. 은퇴를 선언했던 2013년부터 ‘그대들은…’이 개봉하기까지, 9년에 걸쳐 미야자키 감독을 밀착 취재했고, 촬영 분량만 1000시간이 넘었다. 일본 NHK에서 방영된 시리즈를 120분 분량의 영화로 재편집했다. 다큐멘터리는 제77회 칸 영화제 클래식 섹션에 초청됐다.

다큐멘터리 감독 아라카와 가쿠와 연을 처음 맺은 작품 ‘벼랑 위의 포뇨’의 한 장면. /스튜디오 지브리

세계적인 거장이지만 동네 아이들에게는 그저 ‘지브리 할아버지’로 불리는 미야자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비범한 천재, 까칠한 완벽주의자로 각인돼 있지만 이번 다큐멘터리에서만큼은 유독 불안과 좌절, 피로를 숨기지 않는다. 쇠약해진 거장의 모습을 이렇게 날것 그대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벼랑 위의 포뇨’부터 20년 가까이 미야자키를 기록해 온 아라카와 가쿠 감독 덕분이다. 카메라는 마치 오랜 친구가 곁에서 지켜보듯 그를 따라간다. 때로는 짓궂은 편집으로 미야자키를 놀리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곁을 지키며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묵묵히 담아냈다.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등장하는 왜가리의 스케치. /엔케이컨텐츠

영화는 미야자키가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다시 작업에 뛰어든 이유에서 출발한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부터 지브리 작품의 색채 디자인을 맡아온 야스다 미치오의 한마디가 계기가 됐다. 야스다는 암 투병 중 미야자키에게 “작품 하나 더 해라. 아직 살아있으니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제작에 돌입했을 당시 미야자키의 나이는 78세, 그는 일정표에 ‘살아 있을까?’라고 적어두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전반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50년 넘게 함께한 동료이자 라이벌, 동경과 애증의 대상이었던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부터 가까웠던 친구들의 잇따른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괴로워하고, 불면에 시달리며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모습도 고스란히 담겼다. “왜 나만 살아 있을까”라는 그의 넋두리는 ‘그대들은…’이 유독 무겁고 철학적이었던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왼쪽)와 스즈키 토시오./엔케이컨텐츠

또 하나의 축은 지브리 공동 창립자이자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와의 관계다. ‘그대들은…’에서 주인공 마히토를 이세계(異世界)로 안내하는 왜가리는 스즈키를 모델로 만들어졌다. 책상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는 미야자키를 보여주는 장면에도 스즈키가 등장해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쾌감을 느끼고 있다”고 능청스럽게 설명한다. “감독님에게는 영화 속 세계가 현실이에요. 현실 세계는 오히려 허구죠.”

지브리 팬들에게는 선물 같은 영화다. 꿈과 현실을 넘나들듯, 애니메이션 속 장면과 미야자키의 삶을 교차시키는 연출로 보는 재미를 더한다. 무엇보다 노쇠한 거장이 왜 번번이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연필을 쥐는지 엿볼 수 있다. 미야자키는 “영화에 목덜미를 잡혀서 도망칠 수 없다”고도 말한다. 사무실 구석의 작은 책상에 앉아 한 컷을 며칠씩 붙들고 있고, 연필과 지우개로 고치고 또 고치며 집요하게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물었던 거장은, 자신의 치열한 삶으로 그 질문에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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