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 이제는 하드웨어다] 5. 기록문화의 성채를 세우자

김진형 2026. 4. 10.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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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원 의무 설치 불구 강원 전무
공연예술계 대본·포스터 등 유실
신청사 이전 현 청사 문화거점 거듭
도의회 건물 역사기록 박물관 조성
용역 계획 미수립·기관 입주 희망 변수
AI 스마트 아카이브 시스템 구축 중요

기록 부재에 소멸되는 강원 예술…도청사 활용 열쇠 될까


강원의 기록이 곳곳에서 사라지고 있다. 문화유산급 기록물들이 습기 찬 지하실과 개인 연구자의 서재, 혹은 이름 모를 창고 안에서 곰팡이와 싸우며 소멸의 단계를 밟고 있다. 기록의 부재는 단순한 자료의 상실이 아니다. 존재의 망각이며, 나아가 지역 정체성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기록’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담아낼 물리적·시스템적 하드웨어 구축의 시급성을 진단한다.

■강원은 왜 ‘기록 무법지대’가 되었나

최근 율곡국학진흥원 주최로 열린 ‘강원특별자치도 기록유산의 미래’ 정책 세미나는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낸 자리였다. 2006년 개정된 공공기록물관리법에 따라 광역 지자체는 연구기록물관리기관(기록원)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강원도는 여전히 전담 기관이 부재한 ‘법률 위반 상태’에 놓여 있다.

이미 서울과 경남은 전담 기록원을 설립해 지역의 행정 기록은 물론 민간의 소중한 사료들까지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반면 강원도는 수십 년 전 발간된 향토사 자료 등 여전히 개인 연구자의 기억과 소장품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다. 기록물관리기관 건립은 국가 지원 사업이 아닌 지자체의 재량 사업으로 분류되어 있어, 예산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1997년 극단 태백의 ‘정부사’ 공연 모습
1994년 극단 태백무대의 ‘칠산리’ 공연 모습.

공연예술계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강원 연극은 1950년 창단된 ‘동해악극단’을 필두로 영국 국립극장보다 10년 이상 앞선 뿌리를 가졌으나, 이를 증명할 사료는 부실하다.

정은경 문화이음 대표는 “고전 ‘안티고네’의 기록조차 20초 영상이 전부”라며 부식된 수기 대본과 포스터들이 개인 창고나 폐지로 사라지는 유실 실태를 전했다. 이은경 연극평론가도 “사료 부재로 원로들의 구술에만 의존해 교차 검증조차 어렵다”며 “지역의 선구적 형식이 기록 미비 탓에 수도권에서 ‘최초’라는 타이틀로 소비되는 등 역사가 지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기록의 성과도 있었다. 춘천문화원 춘천학연구소의 춘천디지털기록관 등이 대표적이며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산림녹화 기록물 중 강원도가 28%의 자료를 확보한 것 또한 묵묵히 자료를 보존하고 지켜온 이들의 숨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현 도청사 활용안, ‘기록의 허브’가 될 수 있을까

강원도는 신청사 이전을 앞두고, 봉의산 아래 현 청사 부지를 관광과 문화 거점으로 활용하겠다는 방안을 지난달 발표했다. 이 계획의 핵심 중 하나가 도의회 건물을 활용한 ‘강원 역사기록 박물관’ 조성과 강원기록원 설립이다.

최대현 청사기획팀장은 “강원도의회 건물 지하 1~3층 사무공간과 을지훈련 시 사용되는 벙커 시설이 기록물 보존의 핵심인 수장고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에 강원기록원과 강원역사문화연구원이 입주하면 약 153명 규모의 인력이 배치되어 소장품들을 통합 관리하게 된다. 강원역사문화연구원 또한 정밀 안전진단 용역 결과, D등급 판정을 받아 청사 이전이 시급한 상황이다. 또한 1957년 건립된 강원도청 본관 청사는 이미 역사문화적 건축물로서 가치가 높다. 강원도는 옛 서울시청을 개조한 서울도서관처럼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용안이 무조건적인 긍정적 미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강원기록원 건립에 대한 구체적인 밑그림과 예산 계획은 여전히 안개 속이기 때문이다.

배영미 도 기록관리팀장은 “현재는 도청 발간 문서와 행정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기초 작업에 주력하고 있으며, 기록원 건립에 관한 구체적인 예산 설정이나 용역 계획은 아직 수립되지 않은 상태”라고 밝혔다. 공간에 대한 구상은 나왔으나 이를 채울 구체적인 운영 전략과 재정적 뒷받침은 논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또한, 도청 이전으로 발생하는 공간에 16개 기관 직원 500여 명이 대거 입주를 희망하고 있다는 점도 변수다. 도에서 진행한 수요조사에 따르면 강원인재원, 강원문화재단, 강원관광재단, 강원도서비스원 등이 입주 희망 의사를 밝혔다. 기관들의 임대료 부담을 줄인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이나 대규모 인원 수용과 역사적 가치 보존, 그리고 정밀한 기록물 관리 환경 조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우려의 시각도 존재한다.

■ 기록원 설립의 선결 조건 ‘보관’을 넘어 ‘유기적 연결’

물리적 공간인 기록원을 짓는 것보다 앞서야 할 선결 조건은 ‘기록을 어떻게 정의하고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설계다. 전문가들은 단순히 과거의 서류를 쌓아두는 ‘창고형 아카이브’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기록원 설립의 핵심은 흩어진 1차 사료를 모으고 하나의 ‘유기적 플랫폼’으로 묶어내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특정 마을 기록을 수집할 때 단순히 행정 문서를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역사·문화·예술적 가치를 AI 기술로 분석해 입체적 접근할 수 있도록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준구 강원문화예술연구소장은 “이제는 문화원이 기록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문화재단도 중요성을 점차 인식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플랫폼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각 기관이 해야 될 일들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적인 것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어내고, 세계적인 것을 지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끔 전통적인 원근법을 깬 ‘큐비즘’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물리적 공간 구축만큼 중요한 것이 디지털 공간에서의 시스템이다. 율곡국학진흥원이 제안한 ‘강원형 스마트 아카이브’의 사례가 있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방대한 자료에서 메타데이터를 추출하고, 곰팡이 핀 한문 자료나 초서(草書) 문집들을 판독하여 도민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검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간과 공공의 협업 모델도 필수적이다. 공공이 기록 관리 표준과 플랫폼을 제공하면, 민간은 현장에서 기록을 생산하고 축적하는 ‘상향식(Bottom-up) 아카이브’ 모델이야말로 강원 기록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열쇠로 꼽힌다.

경남기록원이 지역 언론사 등의 기록물을 기증받아 정체성을 지켜낸 사례가 대표적이다. 전가희 경남기록관 팀장은 “자기만의 기록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며, 결국 수장고 문제를 해결하는 실무적 접근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팀장은 “자료를 이관하면서 70년동안 잠자고 있던 기록물이 발견되는 일도 있었다. 기록원은 단순히 기록을 수집하는 것을 넘어, 지역의 기록물이 잘 관리되도록 안내하는 일도 맡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시민의 발길이 닿는 기록원과 문화예술이 어우러진 복합 플랫폼을 세우는 일, 그리고 AI 기술을 통해 이를 도민의 손안으로 돌려주는 일이 시급하다. 사라져가는 강원의 역사를 붙잡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김진형·이채윤·안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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