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이 안 된다면 우리가 만듭니다”···다큐 ‘주희에게’ 들다방부터 대학 강당까지 스크린 밖으로 이어진 ‘연대의 대화’

손봉석 기자 2026. 4. 9.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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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폭력, 제주 4·3, 장애인의 삶, 세월호 참사 등 각기 다른 상실을 겪은 이들이 서로에게 기꺼이 곁을 내어주는 연대를 묵직하게 다룬 다큐멘터리 ‘주희에게’(공동연출 장주희·부성필·김성환)가 극장의 문턱을 넘어 다채로운 대안 공간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배급사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개봉이 아닌, 관객 스스로 상영 공간을 열어내는 ‘100개 극장 프로젝트’를 통해 스크린 안팎의 장벽을 허문 진정한 연대의 장이 펼쳐진 것이다.

■ “극장이 싫은 게 아니다”… 비장애인 중심의 인식에 던진 화두

다큐멘터리 ‘주희에게’가 번듯한 정식 극장이 아닌 대안 공간 상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배경에는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작품을 공동 연출한 부성필 감독은 “영화의 주인공인 철규 형은 영화를 좋아해서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멀티플렉스 극장에 갑니다. 보통 사람이 없는 낮 시간대에 가죠. 형이 싫어하는 건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아닙니다. 현재 대부분의 극장 휠체어석이 맨 앞줄 구석에 있다 보니 시선도 불편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뒤에 앉은 비장애인 관객들이 내려다보는 그 ‘시선’을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부 감독은 철규 씨를 언급하며 비장애인 중심의 시선을 꼬집었다. “철규 형은 ‘자신의 몸이 보여지는 것 자체가 운동’이라며 기꺼이 카메라 앞에 선 주체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형이 영화를 보러 간 일상적인 공간에서조차 비장애인들의 호기심이나 동정이 섞인 시선을 받으며 ‘유별난 구경거리’ 취급을 받는 것을 견뎌야 합니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물리적인 문턱을 낮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애인을 동등한 이웃이 아닌 수동적인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어쩌면 더 폭력적이고 견고한 장벽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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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사 분향소에서 이어진 ‘들다방’ 상영회… 시선의 장벽을 허문 연대

지난 1일, 관객들은 정식 극장이 아닌 종로구 노들장애인야학 복합문화공간 ‘들다방’으로 향했다. 관객추진단의 자발적 기획으로 이루어진 특별 상영회였다. 이 자리를 직접 주최한 혜원 활동가(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는 과거 ‘4.16연대’ 소속으로 이태원 참사 분향소 지킴이 연대를 나갔다가 선철규 씨와 처음 만났다. 당시 폭염 속에서 체온 조절이 어려웠던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이 분향소의 그늘막으로 피신해 오면서 자연스럽게 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상영회가 열린 들다방이 관객들에게 정식 극장보다 큰 해방감을 준 이유는 명확했다. 휠체어석이 맨 앞줄 구석으로 격리된 일반 극장과 달리, 이곳에서는 휠체어가 공간의 어느 곳이든 자유롭게 자리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등 뒤가 아닌, 모두와 수평적인 시선에서 영화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장애인 관객들은 “비로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편안함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의 만남은 세월호와 이태원이라는 ‘재난 참사’를 위로하는 공간이, 사회적 약자인 ‘중증 장애인’에게 기꺼이 피난처가 되어주며 서로의 삶이 맞닿아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는 각기 다른 아픔을 가진 이들이 거대한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연대하는 다큐멘터리 <주희에게>의 핵심 메시지가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된 것이기도 했다.

이날 ‘주희에게’가 상영된 들다방은 번듯한 스크린이나 푹신한 좌석도 없는 식당 겸 공간이었다. 대학로 근처 극장에는 많은 수의 휠체어어를 수용할 수가 없어 모인 대안 공간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이날 관객들은 각자의 삶과 사회적 상처가 영화를 매개로 연결되는 경이로운 경험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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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관객은 “과거 장애인 권리 보장 시위 현장에 세월호 유가족분들이 오셔서 연대 발언하시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왜 저분들이 여기까지 오셔서 말씀하실까’ 궁금했는데, 오늘 영화를 보고 나니 그 모든 아픔과 투쟁이 완전히 다 연결되어 있다는 걸 비로소 느꼈다”고 고백했다. 또 다른 관객은 “내가 직접적인 참사 당사자가 아님에도, 개인적인 상실의 기억이 영화 속 참사들과 겹쳐지며 내 삶과 영화가 계속 들락날락하는 압도적인 느낌을 받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장애인 당사자의 시선에 대한 예리한 통찰도 이어졌다. 또 다른 한 관객은 “영화 속 철규 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니, 우리 사회가 비장애인 중심으로 너무 매끄럽게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이 불쾌할 정도로 낯설게 다가왔다”며 뼈있는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내가 직접적인 참사 당사자가 아님에도, 개인적인 상실의 시기와 영화 속 참사들이 내 삶의 그물망 속에서 건너건너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와 내 삶이 끊임없이 들락날락하는 압도적인 감상이었다”며 사회적 약자를 고립시키지 않는 연대의 힘에 공감했다.

■ 22살 대학생이 ‘경기대’ 강당에 올린 스크린… 제도적 장벽을 허문 청년들

들다방 상영회가 휠체어의 ‘물리적 장벽’을 넘은 자리였다면, 지난 2일 경기대학교 수원캠퍼스 강당에서. 소규모 동아리 ‘다크투어리즘 기억행(行)’의 이주원 학생(3학년) 직접 관객추진단이 되어 강당에 스크린을 세웠고, 이에 세월호 참사 유가족 전인숙 씨(경빈 엄마)와 부성필 감독이 직접 현장을 찾아 화답했다.

전인숙 씨는 111분 동안이나 부질없이 CPR을 하며 시간을 끌었던 해경 지휘부의 무책임함과, 오히려 책임자가 유가족에게 소송 비용을 청구하는 기막힌 현실을 고백하며 객석을 숙연하게 했다. 어머님은 “진상 규명의 과정이 너무 고독하지만, 부조리에 관심 갖고 알려는 청년들이 있어 큰 위로가 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에 학생들은 1999년, 불법 영업 중이던 상가 건물에서 발생하여 5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당한 인현동 화재 참사 등을 언급하며 “기억이 흐려지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라는 진지한 고민으로 연대의 뜻을 전했다.

“기억이 흐려지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라는 학생들의 진지한 고민에 전인숙 님은 뼈아픈 현실을 고백하며 끝없는 연대를 당부했다. 그는 “참사 현장에 찾아가 그분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그 자세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학생들을 다독였다. 이어 “해경이 20분이면 갈 거리를 4시간 41분이나 끌고 다니면서 면피를 위해 111분 동안이나 부질없이 CPR을 했다. 그런데도 법원은 해경 지휘부의 중대한과실 책임을 기각했고, 오히려 책임자인 전 목포서장이 우리 유가족에게 소송 법률 비용을 내놓으라며 우편을 보내는 기막힌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진상 규명의 과정이 너무 고독하지만, 부조리에 관심 갖고 알려는 청년들이 있어 큰 위로가 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주희에게’ 속 한 장면

■ “당신이 꾸는 꿈은 무엇입니까”… 상처 입은 이들의 단단한 대답

학생과 창작자, 당사자가 서로의 벽을 허물고 마주한 이 자리에서는 서로의 ‘꿈’을 묻는 따뜻한 질문도 이어졌다. 앞으로 바라는 꿈이 무엇이냐는 학생의 질문에 전인숙 어머님은 “어릴 때는 그저 아이에게 못해본 걸 다 시켜주는 평범하고 좋은 엄마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참사 이후에는 제 개인적인 꿈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고 담담히 고백했다. 이어 “오로지 ‘진상 규명’만이 내 인생의 목적이 되었다. 진상이 밝혀져야 비로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에, 지금 누군가 꿈을 물어보면 늘 ‘세월호 진상 규명’이 1순위라고 대답한다”고 밝혀 객석을 먹먹하게 했다.

부성필 감독은 영화 속 주인공인 철규 씨의 일화를 통해 진정한 연대의 의미를 짚었다. 부 감독은 “철규 형에게 ‘번지점프가 그렇게 뛰고 싶으면 방송국이나 기업 후원을 받아서 한 번 해보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철규 형은 ‘방송국이나 기업에 가서 약간 동정의 모습을 보여주면 자본이 있으니 번지점프 같은 건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만 하는 것 아니냐’라고 답하더라”며 일화를 전했다. 이어 “자본에 기대어 자신의 불쌍한 모습을 일회성으로 전시하기보다, 근본적인 시스템의 변화를 바라는 형의 단단한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며, “거창하지 않더라도 누군가 동정의 대상이 되거나 일상을 속이지 않고, 모두가 동등하고 편안하게 각자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고 답해 깊은 울림을 남겼다.

이처럼 극장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장애인들, 대학생들까지 단 한 사람도 배제하지 않고 스크린 밖 묵직한 연대를 실천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주희에게>는 오는 4월 15일 정식 개봉한다. 관객들의 손으로 직접 열어내는 ‘100개 극장 프로젝트’를 통해 전국 곳곳의 대안 공간과 지역 극장에서 그 뜨거운 열기를 계속해서 이어갈 예정이다.

‘주희에게’ 속 한 장면

[영화 상세 정보]

제목: 주희에게 (Dear Juhee)

공동연출: 장주희, 부성필, 김성환

제작/배급: 미디어나무, 와동필름

영화제 공식 초청: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2025)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

정식 개봉일: 2026년 4월 15일(수)

관객 추진단 및 예매 : 링크 오마이시네 홈페이지

손봉석 기자 paulsoh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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