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미치광이 전략’ 이젠 통하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 당시 닉슨 행동 모방
자신을 위험한 인물로 인식시켜
FT “닉슨과 달리 공개적 위협”
이란 지정학적 맥락도 차이 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을 향해 “문명 말살”이나 “석기시대로 되돌리겠다”고 위협하다 휴전으로 급선회한 행보를 두고 고 리처드 닉슨 전 미 대통령의 ‘미치광이 이론’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그러나 50년도 지난 닉슨의 전략이 현재에도 통할 가능성은 적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8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1기 때부터 미치광이 이론을 실전에 옮겼고 이란 전쟁에서도 같은 수법을 동원했지만 닉슨 시절보다 지금은 이 이론이 통하기 더 어렵다”고 분석했다. 미치광이 이론은 협상 상대에게 자신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위험한 인물로 인식시켜 저항 의지를 꺾는 전략으로 닉슨 행정부 당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닉슨은 “북베트남이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겠다. ‘닉슨은 화가 나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말을 흘리면 호찌민 (주석)이 달려와 평화를 구걸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구 소련 측에 자신이 “다소 미쳤고 잔혹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키신저에게 “베트남을 핵무기로 박살 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알리 바에즈 국제위기그룹 이란 담당 국장은 영국 가디언에 “트럼프는 이번 분쟁에서 깔끔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론자들이 흠집 낼 수 없는 ‘승리 서사’를 만들 결정적 한 수를 원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묵시록적 위협으로 이란을 압박해 출구를 마련하는 동시에 지상군 투입이라는 최악의 선택지를 피하려 했다는 설명이다.
닉슨은 트럼프 대통령과 1982년부터 11년간 펜팔로 지냈다. 30대 부동산 사업가였던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편지를 보냈고 60대였던 닉슨은 “공짜로 조언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FT는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이 닉슨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짚었다. 닉슨은 위협을 비공개 채널을 통해 전달해 물러서더라도 체면 손상이 심하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문명을 끝장내겠다”는 발언은 전 세계에 공개됐다는 것이다. 공언한 이상 어느 시점엔 실행해야 한다는 압박이 뒤따르며 이란과의 조건부 휴전 이후에는 이 압박이 오히려 커질 수 있다.
지정학적 맥락도 다르다. 20세기 중반 베트남은 세계 경제의 변방이었지만 21세기 이란은 그렇지 않다. 몇주간의 전쟁만으로도 반세기 만의 최악의 에너지 위기가 촉발됐다. ‘미치광이식’ 확전은 유가 급등을 넘어 석유 공급망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미국 내 이란전 지지율은 30%대에 불과하다. FT는 “독재 정권은 민주주의 국가의 국내 여론을 읽을 줄 안다”며 “북베트남이 미국 내 반전 분열을 파고들었듯, 이란도 같은 전략을 사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가디언은 닉슨의 결말을 반면교사로 제시했다. ‘광인’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다 정체성 자체가 그 이미지에 묶여버린 닉슨은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불명예 퇴진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미군 전사자 5만8000여명 가운데 2만명 이상이 닉슨 임기 중 발생했다. 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체결했지만 2년 뒤 사이공(현 호찌민)이 함락됐다. 신문은 ‘광인을 연기하는 것’과 실제 광인이 되는 것 사이의 경계가 어디인지 트럼프 대통령이 직시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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