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신구, 110분간 무대를 압도하다
연극 '불란서 금고'서 열연
정교한 대본·베테랑 연기로
각양각색 욕망의 충돌 그려
64년 연기 인생 내공 돋보여

"북벽 장춘이라고 했다."
막이 오른 직후 배우 신구가 내뱉는 짧은 첫 대사에 객석이 숨을 죽인다. 조용히 읊조리는 그 대사에 64년 연기 내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장진 감독이 지난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관람하며 신구의 연기에 전율을 느껴 펜을 들었다는 연극 '불란서 금고'는 올해 90세의 국내 최고령 현역 배우 신구를 위한 110분짜리 헌사이자, 그 헌사에 배우가 무대 위에서 보내는 답장이기도 하다.
연극은 은행을 털기 위해 금고가 위치한 지하실에 모인 일면식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수수께끼의 인물로부터 은행이 자정에 정전된다는 소식을 듣고 모인 이들은 보안이 해제되는 그 틈에 금고를 열고자 한다. 누군가는 돈을 쫓고, 누군가는 금고 안에 들어 있다는 그림을 노리고, 또 누군가는 난공불락의 금고를 뚫어보겠다는 욕심 하나로 지하실로 향한다.
서로의 이름조차 모른 채 한자리에 모였지만 이들은 전기가 차단되는 자정까지 함께 버텨야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손에 넣을 보물을 생각하며 모두 꿈에 부풀어 있다. 물론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제작된 금고는 예상보다 복잡했고, 지하실에 예기치 않은 불청객까지 나타난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자신의 욕망을 채울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맹인, 교수, 밀수업자, 건달, 은행원. 각자의 사연과 목적을 품은 이들이 밀폐된 지하 공간에서 부딪히며 벌어지는 소동이 극의 골격이다.
'불란서 금고'는 장진 감독이 '꽃의 비밀'(2015) 이후 10년 만에 내놓은 연극 신작이다. 닫힌 공간에 인물들을 가두고 대사만으로 110분을 끌고 가는 구성은 '바르게 살자'나 '킬러들의 수다' 등 그의 코믹 범죄물에서 보았던 장진표 문법의 연장선에 있다.
대본 속 대사들은 장진 특유의 말맛을 담되 어느 한 줄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다. 앞선 상황을 받아 이후 전개될 이야기에 정확하게 맞물리는 대사들이 군더더기 없이 이어진다. 퍼즐이 맞춰지듯 정교하게 진행되는 서사는 극의 또 다른 재미다. 정체를 숨기자며 신신당부하던 이들이 자정을 기다리며 이름과 직업, 나이 등 각자의 정체가 의도치 않게 하나씩 밝혀진다.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밝혀지는 가운데 110분이라는 적지 않은 러닝타임도 단숨에 지나간다.
대본의 중심에는 신구가 있다. 신구가 맡은 전설적인 금고털이 기술자 '맹인'은 극의 문을 열고 닫는 독백들을 모두 맡고 있다. 크게 소리치는 대신 조용히 읊조리듯 내뱉는 대사들이 관객석 구석구석까지 또렷하게 닿는다. 64년 경력이 만들어낸 관록의 발성이다. 장진 감독은 신구의 절제된 움직임과 낮은 톤의 발성이 가장 빛날 수 있도록 극을 설계했다.
극 중 맹인이 언급하는 '북벽 장춘'은 북벽에 오른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이야기로, 인물들의 욕망을 상징한다. 제한된 공간과 단순한 조건 속에서 인물들의 목적과 선택이 교차하고, 각자가 생각한 '북벽'이 실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작품은 이 우화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까지 오르려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도 느릿한 걸음걸이를 유지하며 초연하게 대사를 내뱉는 신구의 연기가 관객석을 압도한다.
신구 외 배우들의 활약도 돋보인다. 교수 역 김한결, 밀수 역 장영남, 건달 역 주종혁, 은행원 역 김슬기 등 더블캐스트로 꾸려진 배우진 모두 베테랑다운 연기력을 선보인다. 이들이 웃음을 노릴 때면 여지없이 객석에서 반응이 터진다. 다섯 인물이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정교하게 주고받으며 극을 완성시켜 나가는 앙상블은 코미디에서 대사의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탄탄한 대본과 숙련된 연기가 맞물리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무대다.
공연은 대학로 놀(NOL) 서경스퀘어에서 5월 31일까지.
[구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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