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게 짠, 뜨겁게 짠…기분이다 한잔 더, 사케!

정소람/김성우 2026. 4. 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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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취향껏 술술…사케의 재발견


“와인은 포도의 눈물이고, 사케는 쌀의 영혼이다”라는 말이 있다. 척박한 땅에서 자라난 포도에서 탄생한 술이 와인이라면, 사케는 대지의 산물인 쌀을 깎고 깎아 핵심만 남긴 정수다. 장인들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정성 덕일까. 한때 ‘정종’이라는 낡은 이름 속에 갇혀 있던 사케는 최근 젊은 층에 ‘힙한 술’로 받아들여지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관세청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사케 수입액은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사케의 가장 큰 매력은 집요하리만큼 고집스러운 ‘장인 정신’에 있다. 쌀알의 겉면을 50% 이상 깎아내는 ‘다이긴조’급 사케를 만들기 위해 양조장의 장인들은 차가운 겨울 새벽부터 쌀을 씻고 누룩을 빚는다. 0.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미(精米) 과정은 단순한 가공이 아니라, 불필요한 맛을 덜어내고 쌀이 가진 가장 투명한 영혼에 도달하려는 ‘수행’에 가깝다. 양조 장인들이 ‘고코로’(心·마음)와 ‘다마시’(魂·영혼)를 사케의 주재료라고 언급할 정도다. 이렇게 만들어진 맑고 깨끗한 주질(酒質)은 어떤 음식과도 충돌하지 않고 식재료 본연의 맛을 우아하게 받쳐준다.

온도에 따라 표정도 다채롭게 바뀐다. 차갑게 마실 때 느껴지는 화사한 꽃향기부터, 따뜻하게 데웠을 때 피어오르는 겨울의 온기까지. 어쩌면 계절의 변화를 혀끝으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술이다. 최근 사케는 전통을 넘어 파격적인 진화를 시도하고 있다. 과거에는 단일 품종의 쌀과 특정 양조장의 색깔을 고수했다면, 이제는 와인처럼 서로 다른 사케를 ‘블렌딩’하거나 포도주에서만 쓰이던 ‘빈티지’(생산 연도) 개념을 도입해 소장 가치를 높이고 있다. 고급 와인과 위스키의 복잡함에 피로감을 느낀 젊은 세대가 사케 특유의 정갈함과 매력에 빠져들면서 전국 곳곳에 잔술을 즐기는 ‘사케 바’도 생겨나는 추세다.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에 등장하는 손님들은 마스터(주방장)가 건네주는 사케 한 잔에 하루의 고단함을 녹인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일상, 쌀과 장인의 영혼이 담긴 사케 한 잔으로 이번 주를 마무리해 보는 건 어떨까.

한 잔에 담긴 수백년 '진심'…후지산 느림의 사치에 취하다
日양조장 후지니시키·이데

후지산 주변에는 장인들이 대를 이어 운영하는 사케 양조장이 많다. /후지니시키 홈페이지


진정한 사치란 무엇일까. 반짝이는 물건을 곁에 두는 일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쌓아 올린 이야기를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여유 아닐까. 서두르지 않고, 눈앞의 결과보다 그 뒤에 깃든 시간과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 말이다.

일본 후지산 인근에는 이런 사치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사케(니혼슈) 양조장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시즈오카의 ‘후지니시키’, 다른 하나는 야마나시의 ‘이데’다. 둘은 같은 후지산 물을 쓰지만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쌓아 올려왔다. 후지니시키가 인간과 공동체를 향한 따뜻한 술을 만든다면 이데는 자연을 가장 닮은 술을 빚는다. 후지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스토리를 써내려온 두 양조장을 찾아가봤다.

1688년 문 연 시즈오카현 ‘후지니시키’ 양조장


후지니시키 양조장 내부(위). 사케는 쌀을 찐 뒤 효모를 대량으로 증식시켜 만든다. 쌀과 누룩, 물이 어우러지며 특유의 향을 만들어낸다. /김성우·후지니시키 홈페이지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에 자리한 후지니시키 양조장은 1688년 문을 열어 18대를 이어온 곳이다. 후지산 자락을 따라 한참 들어가면 오래된 기와지붕과 소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시간이 만든 단단함이 느껴진다. 마당에서 보이는 후지산의 만년설은 이곳이 단순한 ‘술 공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용히 말해준다.

양조장 안으로 들어서면 공기가 확 달라진다. 서늘하고, 약간 달콤하면서도 깊은 발효 향이 감돈다. 오래된 서까래가 지붕을 받치고 있고 그 아래에는 발효 탱크가 줄지어 놓여 있다. 가까이 가면 술이 익어가는 향이 더 진하게 올라온다. 한쪽에는 오래 사용한 나무 압착기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손때 묻은 표면이 이곳에 쌓인 시간을 말해준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벽 한쪽에 놓인 위패다. 장인들은 매일 아침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이곳에 절을 올린다. 술이 잘 익기를,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다루는 일인 만큼 자연 앞에서의 겸손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18대 양조장 대표 세이 시니치는 이곳이 만드는 술의 본질을 ‘위로’라고 정의한다. 원래 지역 지주이던 세이 가문은 가을 수확이 끝나면 농민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술을 나눠줬다고 한다. 술 한 잔이 사람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던 셈이다. 이 철학은 지금도 이어진다. 겨울 농한기에는 지역 농민을 양조장으로 불러 일을 맡기고, 봄에는 ‘구라비라키’라는 개방 행사를 열어 지역 농산물을 함께 판매한다. 술을 제조하는 일이 곧 지역을 살리는 일이 된 셈이다.

후지니시키가 만드는 술맛의 핵심은 물과 쌀이다. 후지산에서 내려온 ‘초연수’는 미네랄이 적어 매우 부드럽다. 여기에 시즈오카 전용 쌀 ‘호마레후지’가 깔끔한 맛을 만든다. 대표 제품인 ‘도쿠베쓰 준마이 호마레후지’는 은은한 멜론, 배 향과 함께 가볍게 넘어간다. 목에 부담이 없고 오래 마셔도 질리지 않는다. 화려하진 않지만 편안하다. 이 술은 조용히 곁에 머무는 방식으로 사람을 위로한다.

170년째 술 빚어온 야마나시의 ‘이데’ 양조장


도쿄에서 서쪽으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야마나시의 이데 양조장에는 또 다른 서사가 기다린다. 바람이 잦아든 날이면 인근 가와구치코 호수에 후지산이 그대로 비친다. 그 풍경만으로도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이 든다. 이데 양조장은 170년 넘게 이곳에서 술을 제조해왔다. 원래는 간장과 된장을 만들던 집안이었지만 19세기 중반부터 주조업으로 전향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은 이데 양조장의 자부심이다. 이곳은 후지산에 내린 눈과 비가 지하로 스며들어 80년에서 100년 동안 자연 여과를 거친 뒤 다시 솟아난 물을 사용한다. 긴 시간을 지나며 불순물은 사라지고 필요한 성분만 남는다. 지금 마시는 술에 100년 전의 비와 눈이 담겨 있는 셈이다. 이데 양조장은 이 물에 맞춰 ‘저온 장기 발효’를 고집한다. 온도가 낮으면 효모가 천천히 움직이고 그만큼 향이 더 섬세해진다. 예전부터 발효 식품을 만들어온 집안답게 미생물을 다루는 감각도 뛰어나다. 전통적 기술과 현대 설비가 결합해 깨끗하면서도 깊은 맛을 완성한다.

대표 브랜드 ‘카이노카이운’은 야마나시 옛 이름인 ‘카이’의 행운을 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첫맛은 부드럽고 끝맛은 깔끔하게 떨어진다. 향이 좋은 준마이 다이긴조는 생선회와 잘 어울리고, 드라이한 준마이 긴조는 기름진 음식의 느끼함을 잡아준다. 각각의 술이 후지산 풍경을 다른 방식으로 담아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데 양조장이 최근 위스키 증류에도 뛰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길을 찾는 시도로, 오래된 기술이 현재와 만나는 지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두 곳의 양조장을 둘러보며 느낀 점이 있다. 사케 한 잔을 비우는 일은 그 지역의 바람과 물, 사람, 그들이 견뎌온 세월을 함께 맛보는 것이다. 시즈오카의 낡은 기와지붕 아래에서 혹은 야마나시의 차가운 호숫가에서 투박한 잔에 담긴 오랜 이야기를 찬찬히 짚어내는 즐거움.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가 아닐까.

정소람 기자/김성우 법률사무소 솔라리스 변호사(Wave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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