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와 살아가는 법 [이상헌의 바깥길]

한겨레 2026. 4. 9.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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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헌 |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 저자

중세 사람들은 혜성을 보고 불길한 징조를 읽었다. 최첨단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휴대전화를 열고 어느 나라 대통령의 새 게시물부터 읽는다. 오늘의 운세다.

너나없이 한 사람의 입만 쳐다본다. 그가 쏟아내는 글과 말을 분 단위로 확인한다. 새벽 바다로 나가야 하는 어부가 일기예보를 재차 들여다보는 심정과 비슷하다. 바다는 험하고, 하늘은 변덕스럽고, 예보가 틀리면 생계가 흔들린다. 그래도 날씨는 과학이다. 저 말은 최첨단 통신망을 타고 오지만, 그것이 정책인지, 협박인지, 기분인지, 공연인지, 아니면 그 네가지가 한 문장 안에서 합창 중인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의 나라만 그런 것도 아니다. 힘깨나 쓴다는 나라들조차 전전긍긍한다. 국제기구들은 더하다. 회비를 낼지, 덜 낼지, 아예 밀어버릴지, 그날그날의 공기부터 살핀다. 회비란 회원이면 당연히 내는 것 아니냐고 윽박지르기엔 저쪽 덩치가 너무 크고, 못 본 척 살림을 줄여보자니 빠져나가는 구멍이 너무 커서 결국 사람부터 줄여야 한다. 어쩌지도 못한 채 휴대전화만 들여다본다. 국제 정치의 기상위성은 이제 지구 전체를 돌지 않는다. 한곳만 본다. 하늘이 아니라 어느 한 사람의 입술 주변을 맴돈다.

인공지능이고 어쩌고 해도, 징조 해석학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오늘의 징조는 하늘이 아니라 알고리즘 위에 뜬다. 덕분에 우리 시대는 새로운 점성술의 시민을 부지런히 길러낸다. 알림음이 울리면 사람들은 하늘을 보지 않고 화면부터 본다. 별자리는 사라졌지만 속보는 남았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남들은 어떨지 모르니, 나는 내 나름의 개똥철학, 또는행동강령을 만들어본다.

첫째, 이 일기예보를 무시하지는 말아야 한다. 억지로라도 확인은 해야 한다. 내일 파도가 칠지, 기름값이 오를지, 회비가 밀릴지, 국제회의의 표정이 달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예보에 곧장 몸을 던져서는 안 된다. 저 슈퍼컴퓨터는 기압과 해류만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기질과 감정과 자존심과 변덕까지 한꺼번에 반영하므로 너무 자주 바뀐다. 자칫 잘못하면 우산을 샀다가, 몇분 뒤엔 선크림을 사고, 조금 지나 겨울점퍼까지 사게 된다. 삶은 원래 낭비가 많지만, 그와 함께 사는 삶은 특히 충동구매를 부추긴다.

둘째, 해석 방송을 경계해야 한다. 예보가 자주 바뀌면 예보를 해석하는 방송은 더 늘어난다. 세상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한 기상전문채널이 된다. 어제는 최후통첩이었다가 오늘은 협상의 신호이고, 오전에는 종말이었다가 오후에는 전략적 모호성이라고 한다. 사람은 피곤해지면 편리함을 찾는다. 내 마음에 드는 해석만 골라 듣는다. 예보는 바뀌는데 해석은 한 방향이니 마음은 편하다. 바로 거기가 함정이다.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사람은 사이비 치유술에서 안식을 찾는다. 정치도 그렇고, 시장도 그렇고, 역사도 그렇다. 너무 기분 좋은 해석, 너무 흔들림 없는 해석은 대개 현실보다 자기 장사를 더 사랑한다. 아무도 모르니, 나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달래보는 것이 외려 낫다.

셋째, 기호학을 조금 공부해보려 한다. 제국은 말보다 표지판으로 통치하는 경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배경막과 함께 등장하느냐다. 이름 붙이기, 무대 세우기, 종교적 어휘를 덧칠하기, 적을 악마로, 자신을 구원자로 배치하기. 이런 장치를 보다 보면 조금 덜 놀라게 된다. 물론 덜 놀란다고 덜 위험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허둥대는 것보다는, 놀라면서도 해독하는 편이 오래 버틴다. 움베르토 에코가 괜히 그런 말을 한 게 아닐 것이다. “기호학은 거짓말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넷째, 매일 포르노를 보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다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쯤 되면 또 에코를 꺼내볼 수밖에 없다. 에코의 말대로라면, 예술 영화에는 불필요한 공백이 적지만 포르노에는 공백이 넘친다. 차를 타고 괜히 오래 달리고, 호텔 프런트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데도 유난히 늦장을 부린다. 왜 그런가. 그래야 뒤이어 나올 과도한 장면이 덜 과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탈을 일상처럼 보이게 하려면, 중간중간 지루한 정상성의 장면들을 끼워 넣어야 한다.

그도 그렇다. 너무 자주 협박과 전쟁을 말하면 사람들이 지친다. 그래서 골프 치는 장면도 보여주고, 비행기 안에서 기자와 농담하는 모습도 내보내고, 종교적 메시지와 가족사진과 일상적 몸짓을 틈틈이 끼워 넣는다. 그래야 비정상이 정상처럼 보이고, 나도 어느새 “원래 저런가 보다” 하며 지친 마음을 눕혀버린다.

다섯째, 그의 퇴장을 막연히 기다리지 않아야 한다. 한 사람의 퇴장이 한 시대의 퇴장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괴물이 아니다. 오래 쌓인 불안과 피로, 상처 입은 자존심과 과장된 욕망이 빚어낸 산물에 가깝다. 그가 물러나도 그를 가능하게 한 말투와 습관과 상징은 한동안 남는다. 다들 그를 비난하면서도 조금씩 흉내 낼 가능성이 크다. 큰 목소리, 단순한 적대, 과장된 상징은 생각보다 전염성이 강하다. 퇴장은 끝이 아니라 번역의 시작일 수 있다.

이런 기막힌 개별전략을 치밀하게 고민하다가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소박하고 유치해진다. 저쪽은 말과 포스팅으로 세상을 흔들지만, 유치찬란한 나는 그것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 사람은 알고리즘으로 견디지 못하고 체온으로 조금 더 버틴다. 폭탄에 사람이 죽으면, 그것을 국제 정세의 한 장면으로만 넘겨서는 안 된다. 그 죽음 뒤에 남은 핏더미를 기억한다. “그렇겠거니” 하고 다음 속보로 건너뛰지 말아야 한다. 그 핏물의 뜨거움을 잊지 않는 일, 어쩌면 그것이 그와 살아가는 가장 어려운 기술이겠다. 결국 사람을 붙들어두는 것은 논평이 아니라 체온이다.

그는 내가 모든 것을 구경거리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골프장에 모여든 갤러리이길 바란다. 전쟁도, 종교도, 공포도, 심지어 인간의 죽음까지도 하나의 배경화면처럼 넘기기를 바란다. 그러니 나의 마지막 행동요령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포르노를 보는 세상에서, 나는 포르노처럼 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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