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남’ 열풍 속 재조명되는 화순의 의리남, 양팽손

최도철 기자 2026. 4. 9.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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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시신 수습한 영월 엄흥도의 목숨을 건 충정
사약 받아 숨진 조광조를 거둔 화순 양팽손의 의리
왕명 거역하고 역적 시신 거두는 위험 무릅쓴 그들
권력 보다 마음의 명령 따른 선택 역사에 길이 남아
조광조와 양팽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능주의 유림과 후손들이 세운 죽수서원. 화순군 제공

1457년 영월 청령포, 역사가 지우려 했던 시리고 아린 이야기를 풀어낸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누적관객 1600만을 넘기면서 '단종앓이'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왕과 사는 남자'는 폐위된 왕 단종과 그의 곁을 지킨 엄흥도라는 인물을 통해, 권력의 바깥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인간의 의리를 그려낸다. 이와 닮은 장면은 전라도땅 화순에서도 있었다. 기묘사화로 몰락한 정암 조광조와 그의 시신을 거두었던 벗 학포 양팽손의 이야기는, 권력이 외면한 자리를 끝내 떠나지 않은 인간의 선택을 보여준다.

몰락한 개혁가 조광조 곁 지켜
조광조는 중종 대를 대표하는 사림파 학자이자 개혁가였다. 그는 현량과 실시, 위훈 삭제 등을 통해 훈구 세력의 특권을 견제하고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은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1519년 10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조작된 사건이 퍼지며 그의 운명은 기울었다. 이는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모함이었고, 훈구 세력은 이를 빌미로 사림파 제거에 나섰다.

같은 해 11월 15일, 기묘사화가 일어나며 조광조는 역모의 중심 인물로 몰렸다. 그는 곧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 1519년 11월 말, 지금의 화순군 능주면에 도착한 그는 객사 인근의 초라한 민가에 머물렀다. 한때 조정을 이끌던 개혁가는 그렇게 변방의 유배객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유배는 오래가지 않았다. 왕명으로 사약이 내려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리에, 한 사람이 함께 있었다. 양팽손이다.

두 사람은 1510년 사마시에 함께 합격한 뒤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연을 맺었다. 조광조가 개혁을 추진할 때 양팽손은 뜻을 같이했고, 후에 훈구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파직된 뒤 고향인 능주로 내려와 있었다. 유배지에서도 양팽손은 매일 조광조를 찾아 위로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자신의 모든 것 버리고 시신 수습
같은 해 12월 20일 의금부 도사 유엄이 사약을 들고 능주에 도착한 날, 두 사람은 오랜 침묵 속에 마주 앉아 있었다. 세상의 모든 말이 무의미해진 순간, 조광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뜻이 그릇되었는가." 이에 양팽손은 한동안 답하지 못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그러자 조광조는 다시 말을 이었다. "뜻은 하늘에 있었으나, 때를 얻지 못했을 뿐이네." 잠시 후, 사약을 앞에 둔 그는 마지막으로 벗을 바라보며 말했다. "양공, 내가 먼저 가오. 부디 뜻을 버리지 마시오." 이 말은 단순한 작별이 아니었다. 함께 꿈꾸었던 세상에 대한 마지막 당부이자, 살아남은 자에게 남기는 책임이었다. 양팽손은 눈물을 삼키며 끝내 답하지 못했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
조광조 절명시(絶命詩). 화순군 제공

조광조가 숨을 거둔 뒤, 더 큰 선택이 남아 있었다. 역적으로 낙인찍힌 인물의 시신을 거두는 것은 곧 화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양팽손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시신을 수습하고 직접 염을 했다. 그리고 능주 인근 야산에 조용히 묻었다. 이는 단순한 장례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가문을 건 결단이었다. 그 대가는 컸다. 양팽손의 가문은 정치적 불이익을 겪었고, 그의 아들과 제자들 또한 벼슬길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는 끝내 후회하지 않았다. 권력의 명령보다 마음의 명령을 택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며 역사의 평가는 바뀌었다. 조광조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사상은 사림정치의 뿌리가 되었고 후대에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결국 복권되어 명예를 회복했고, 선조대에 이르러 문묘에 배향되었다. 한때 역적으로 버려졌던 인물이 성현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언제나 그를 묻었던 사람, 양팽손의 이름이 함께 남았다.
'靜菴趙光祖先生謫廬遺墟追墓碑' 글자가 새겨진 비신. 조광조의 유배지와 묘소를 기리기 위해 후대가 설치한 비다. 화순군 제공

단종을 지킨 엄흥도의 이야기가 '충정'이라면, 정암을 지킨 학포의 이야기는 '우정'과 '도의'에 가깝다. 그러나 둘 모두 권력의 판단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는 그 이면에서 이루어진 개인의 선택으로 완성된다. 엄흥도와 양팽손의 행동이 그 사례다. 영월땅과 능주땅, 외진 산자락에 몰래 묻힌 한 사람의 죽음은 지극히 초라하다. 그러나 그 곁에 남은 또 다른 한 사람의 선택은, 그 죽음을 역사로 남게 했다.

권력은 사람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 단종과 엄흥도, 정암과 학포의 이야기는 그 사실을 증명한다. 권력이 등을 돌린 자리에서 끝까지 남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역사는 그렇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