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각지대가 없는 CCTV 양심

1990년대 중반, '양심냉장고'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잠든 밤, 텅 빈 도로의 정지선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는 그 짧은 순간의 정직함에 우리는 열광했습니다. 타인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도 자신만의 도덕적 기준을 지켜낸 평범한 이웃의 모습은 당시 우리 사회에 커다란 울림을 선사했습니다. 그러나 삼십 년이 지난 지금, 가슴 따뜻했던 풍경은 희미해지고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와 법적 처벌만이 인간의 행동을 강제하는 삭막한 현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원불교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매우 엄중하게 진단합니다. '지금 시대 인심을 본다면 충(忠)에 병든지 이미 오랜지라, 안으로 양심을 속이되 스스로 뉘우치지 아니하고 밖으로 사회를 속이되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여, 인간의 생활이 서로 복잡해가고 세상의 혼란이 또한 그치지 아니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충'은 단순히 국가에 대한 충성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대하는 성실함, 즉 양심의 정직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안으로는 스스로를 속이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밖으로는 사회적 약속을 어기면서도 수치심을 잃어버린 '양심 결핍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갈수록 복잡해지지만, 내면의 도덕적 중심을 잃어버린 탓에 교묘한 편법과 무질서가 세상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교당 1층의 무인 카페에 '24시간 CCTV 촬영 중'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음에도, 기계적인 감시가 양심의 공백을 온전히 메우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마주합니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는 안일함 하나로 정해진 규칙을 무시하거나, 모두가 누려야 할 공용 공간을 무책임하게 훼손하는 것을 볼 때면 '무인(無人)'이라는 단어가 물리적으로 주인이 없다는 뜻이겠으나, 그 공간에 각자 마음의 주인인 '양심'도 부재한 것 같아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수만 대의 카메라보다 더 무서운 감시자는 바로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밖으로 향하는 감시의 눈은 사각지대를 찾아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안의 양심이 지켜보는 시선은 내가 잠드는 순간에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원불교 교도들은 인과(因果)의 이치를 믿습니다. 내가 지은 것은 반드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진리를 삶의 지표로 삼습니다. 재판에 삼심제가 있듯 진리계(법계)에도 세 번의 재판이 있고, 그중 초심(初審)이 '양심의 판정'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행위의 기로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심판하는 것은 대중의 시선이나 사회적 법망에 앞선 내 안의 목소리입니다. 밖의 스승은 잠시 나를 인도할 수 있지만, 안의 '양심 스승'은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고 내가 가는 길이 죄의 길인지 복의 길인지를 매 순간 판결합니다. 우리가 쉼 없이 마음공부에 매진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살기좋은 세상을 만드는 동력은 외부의 감시나 처벌에 있지 않고, 각자 내면의 양심을 스승 삼고, 그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마음공부의 힘'에 달려 있습니다. CCTV가 없는 곳에서도 정지선을 지키고, 주인이 없는 카페에서도 질서를 존중하는 행위가 사소해 보이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지탱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각자의 마음속에 켜진 양심의 등불이 하나둘 모여 세상을 환하게 비출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어떠한 감시 카메라도 필요 없는 세상,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행복한 낙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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